종교에 대한 오해: 현실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를 위해
이 글은 제가 브런치에 쓴 종교에 관한 글로 블로그 용으로 일부 수정해서 올립니다.
<목차>
0. 들어가는 말: 종교를 알아야 보이는 정치, 그리고 투자
_일론 머스크
_왜 트럼프인가
_종교와 미국
* 태아의 생명
* 성(gender)에 대한 정책
1. 종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면 좋은 이유: 현실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
2. 오해 1: 한 사람의 세계관은 오직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3. 오해 2: 종교관은 삶의 지극히 작은 영역만 차지한다.
4. 오해 3: 모든 종교는 표면적으로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같다
5. 오해 4: 한 종교만 옳다고 하는 건 편협적인 거 아닌가요?
6. 오해 5: 모든 종교는 검증불가하다
7. 오해 6: 신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지적으로 게으른 행위이다.
8. 오해 7: 기독교는 반인권적이다
9. 오해 8: 하지만 종교가 성소수자를 탄압했잖아요
10. 오해 9: 종교는 실질적인 쓸모는 없다.
맺는말: 유토피아- 종교가 없는 사회 vs 다양한 종교가 존중받는 사회?
- 트럼프 지지자 친구들에게 사과의 편지를 보내다
- 종교는 사라지지 않는다
들어가는 말
21세기에 가장 간과되고 있던 것은 아마 종교일지도 모르겠어요.
스스로를 무교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은 물론 종교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구요..
종교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이 세상을 부분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국제 정치, 미국 정치를 바라볼 때, 종교의 역사나 종교*가 사회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무시한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맹점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종교라는 단어가 부담스럽다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핵심 가치’, ‘가치관’, ‘세계관’이라는 단어로 바꿔서 읽어도 됩니다..)
여러 문화권, 각 문명에서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게 뭔지 모르고 살아간다면 어떤 영향이 있을까요?
의외로 많은 영역에서 그 효과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현대과학사에서 지워진 내용이나 미국 역사 기록에서 지워지고 다시 쓰여지는 것들 같이 학술적인 것 이외에도 좀 더 직접적인 것도 연관될 수 있습니다.
미국 주류언론이 취하고 있는 태도. 주류 언론이 목적성을 가지고 여론을 움직이는 것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한국에서 CNN과 MSNBC뉴스를 통해 미국 동향을 ‘파악’했다고 착각할 수 도 있죠. (트럼프가 2024년 대선에서 승리할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면 그런 언론 플레이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 삶을 살아오셨을 수 있습니다.)
종교를 알아야 보이는 정치, 그리고 투자
투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지금의 대한민국의 독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의 약 절반에 달 하는 사람들.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게 된 일론 머스크, 빌 애크먼 등 의외의 인사들 외에도, 뜬금없어 보이는 디즈니+의 실적까지 연관 지을 수 있습니다.
대중의 심리는 투자시장에 영향을 미칩니다.
일론 머스크의 언행은 주가에 영향을 미칩다. 대선결과에 대한 예측은 곧 투자전략에 영향을 끼치죠.
일론 머스크
종교적 관점을 배제하면 ‘경제적 이득‘이란 얕고 단순한 시선으로 밖에 사안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일론 머스크는 전기차 회사 테슬라로 미국을 장악하고 싶어 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기존에 내연기관 자동차업계를 지지하며 블루칼라 지지자들의 선택을 받았죠.
그런 일론 머스크가 왜 트럼프를 지지(endorse) 하게 되었을까요?
제가 일론 머스크의 바빌론비 인터뷰 ‘풀영상’(1),(2), 조던 피터슨과 일론 머스크의 인터뷰 풀영상(X링크), 그 외 다른 인터뷰 영상을 여러 차례 본 후 유추할 수 있었던 건, 일론 머스크는 돈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거였습니다. (그 정도 벌었으면 더 벌 거나 잃는 것에 대해 구애받지 않기 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구 트위터(현 X)의 인수를 생각해 볼게요.
돈이 안될 거라는 건 아마 여러 재무관계자들의 조언을 통해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인수를 감행했죠.
투자로서는 ‘실패’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일론 머스크라서 개선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부분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심지어 미국 선거를 앞두고는 사비를 털어 ‘헌법을 지지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루에 100만 달러의 상금을 내걸기도 합니다.
일론 머스크에게 “표현의 자유”는 돈보다 중요했던 겁니다.
그럼 이 ‘표현의 자유’라는 단어 뒷면에는 뭐가 있었을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자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라는 추상적인 가치관으로 포괄적으로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건 민주주의의 기본인 freedom of speech이 입니다.
그럼 지금의 미국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성에 관한 이슈’이다.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 혹은 ’트랜스젠더리즘‘이라고 불리는 것에 반대 혹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는 것조차 ’혐오이자 차별‘로 분류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주류언론에서는 한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성(젠더)를 선택하기 전, 사회적 전환(social transition) 혹은 성전환 수술 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Dead Naming[데드 네이밍]’, 즉 ‘죽은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폭력적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SNS계정폐쇄부터 주에 따라 실질적인 처벌이 가해지기도 합니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존중으로 시작한 이런 행위가 지금은 '반사회적이고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캐나다의 임상심리학자이자 작가인 조던 피터슨이 진행한 일론 머스크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론 머스크의 아들 자비에르(Xavier)는 성전환수술 거쳐 ‘법적으로 여자’가 되었다는 게 널리 알려졌죠.
그 인터뷰 영상에서 일론 머스크는 현재 미국을 휩쓸고 자신의 아들도 앗아간 ’워크 마인드 바이러스(woke mind-virus’를 파괴하겠다고 맹새했다고 이야기 합니다.
So I vowed to destry WOKE MIND-VIRUS after that.
-Elon Musk-
*Woke-Mind Virus: 민주당/진보주의의 사상을 woke 깨어있음. Woke-ism[워키즘]이라고 부른다.
이 대사를 직접 들어보지 못했다면 일론 머스크의 행보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전기차와 위성사업, 로켓 사업, 뉴럴링크 외에 또 다른 ‘미션‘을 받아들인 것으로 봐야 할지도 몰라요. 이건 ’개인적persoanl’인 것이며 사회적 책임감이나 정의감과 유사한 겁니다.
돈보다 중요한 게 가족이고, 지금 일론 머스크는 일종의 ’복수‘를 하기 위한 임무 수행 중인 것으로 봐도 무방하겠어요.
혹시 모든 게 돈 때문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건 이런 이야기들을 모르기 때문이거나 자신의 가치관 중 돈의 위치가 많이 높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왜 트럼프인가?
트럼프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은 전혀 없었어요.
2016년 코미디센트럴, 미국 SNL 영상, 그 후 선거토론에서 처음 본 후, 그가 희화화되거나 그를 비판하는 콘텐츠만 봐왔다. 끊임없는 자기 칭찬. 무례한 언행. 극도로 낮아 보이는 성인지감수성… 미국의 기독교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행태, 전혀 기독교 가치관을 반영하지 않는 듯한 언행이 그의 ‘신앙’이 정치적 쇼 일 거라는 생각도 갖고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2016년 대선, 2020년 대선 때 트럼프를 옹호하는 부모님과 언쟁을 벌인 적도 있습니다.
2016년 대선이나 2020년 대선 때, 부모님이 트럼프를 좋게 본 이유가 편협적인 알고리듬의 추천에 노출된 영향이라고만 생각했던 과거가 떠오르네요. 트럼프를 지지하는 미국 친구들에게 ‘그래도 그 사람은 좀 아니지 않냐’ 며 그들의 생각을 바꾸려 토론 아닌 토론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CNN과 같은 주류언론에서 2024년 도널드 트럼프를 대상으로 이뤄진 두 차례의 암살시도에 대한 뉴스는 금방 사라졌습니다.
한편 트럼프가 선거유세에서 한 이야기들을 앞뒤 문맥에서 잘라 아주 끔찍한 말을 한 걸로 보도하기도 했죠.
트럼프와 러시아에 대한 관계에 대한 내용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사람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법원 판결로 무혐의를 입증한 후에 그 퓰리처상은 취소되지 않구요.
그렇게 공화당 혹은 보수파들은 CNN, MSNBC 등 주류 언론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독립미디어가 유튜브, 팟캐스트의 형태로 사람들의 선택을 받습니다. 그런 추세가 이어져 트럼프 전 대통령은 탑티어 팟캐스터 ‘조 로건‘의 유튜브에 출연하게 됩니다.
그제야 생각해 보니 한 차례의 트럼프 vs. 힐러리 토론을 본 것 외에는 트럼프가 길게 말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들어본 적은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마침 일론 머스크와 인터뷰를 했던 조던 피터슨의 유튜브 채널에서 도널드 트럼프와 그와 ‘팀’을 꾸린 이들에 대한 심리분석을 주제로 한 콘텐츠가 올라왔어요.(링크)
예전에 트럼프의 ‘나르시시스트‘적 요소에 대해 비평을 했던 것이 얼핏 기억이 납니다.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할까 궁금해 들어봤죠. 의외의 평가가 이어졌습니다.
제가 느끼고 공감하던 부정적 요소 외에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긍정적인 평가를 듣게 됐어요.
가장 인상적인 실적인 그의 집권기간에 단 한 차례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과 ‘아브라함 협약(Abraham Accord)’이 노벨평화상 감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죠.
그렇게 어쩌면 제가가 그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게 있을 거란 가능성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타인의 평가보단 직접 들어보는 게 낫다는 생각에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던 ’조 로건(Joe Rogan)’의 팟캐스트(유튜브 링크)를 듣게 되었습니다. (출연 12일 만에 현재 4600만 뷰이다. 2일 전에 업로드된 일론 머스크의 출연분은 1200만뷰.)
조 로건이란 팟캐스터/유튜버가 유명한 건 알고 있었지만 딱히 끌리지 않아서 끝까지 본 건 하나 뿐입니다.
물론 대통령 후보가 팟캐스트에 출연한 게 또 이례적인 사건인 것 같다는 것도 작용했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3시간에 걸쳐 조 로건과 이런저런 이야기하는 트럼프를 마주하게 되었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인상과 다른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트럼프에 대해서는 주류언론, 메인스트림 미디어를 통해서만 미국 소식을 접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죠. 그렇게 트럼프의 다른 인터뷰 영상을 2시간, 3시간 본 후, 조금씩 그의 행보를 되돌아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브라함 링컨이 공화당의 첫 대통령이었고, 공화당이 미국에서 흑인노예제도를 폐지하고자 노력했죠.
종교와 미국
미국은 영국에서 탄압받던 청교도들과 신대륙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종교의 자유’나 국가/정치와 종교의 분리 역시 그런 관점에서 존재했죠. 그들은 ’개신교‘를 국교로 삼지 않고, 다른 종교, 다른 가치관을 갖더라도 포용하게 다는 정신이 헌법에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는 공공영역에서 ’종교적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닌 여러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다른 관점으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 위해서였구요..
트럼프가 싫은 사람들은 공화당, 기독교계에서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해도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이 투표참여자의 약 50%가 되는 것은 미국의 ‘절반’이 지지하고 있는 가치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절반이 ‘미친 트럼프’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그가 대변해 줄 가치관에 투표를 한다는 거죠.
그들은 (1)사회 속에서 가장 약한 존재를 지키는 가치관(낙태권 관련), 그리고 (2)인간의 속성을 가변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문화적 흐름(트랜스젠더리즘)에 대한 저항이 담겨 있습니다.
(1) 태아의 생명
가치관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 가장 핵심적인 건 ‘생명’에 대한 시선입니다.
Roe V. Wade라는 판결이 미국의 ‘보다 수월한 낙태’로 확장된 것을 뒤집었던 게 트럼프 정권 하에 일어난 일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죠. 부모님 세대의 어른들이 선거 때 지지하는 후보나 정당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이 정당/후보는 ‘태아의 인권‘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저 역시 10여년 전 아버지와 반대정당을 지지하며 투표 전에 설득을 시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거 말고 다른 사회 이슈는 어떡할 건지? 부동산 정책과 집 값은 어떡할 건지?
하지만 세 아이의 아빠가 되고, ‘낙태’나 ‘생명의 정의‘에 대해 고민을 하며 살아온 지난 8년 동안 나 역시 ’ 태아의 생명’에 대한 가치관은 ‘여성의 편의’나 ‘선택권’이라는 단어로 타협할 수 없다는 것에 공감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태아는 가장 무고한 존재이며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사회 속에 가장 취약한 존재를 딱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그건 성소주자나 장애인도 아니고 태아입니다.
말을 할 수도 없고 출생 전까지 주민등록번호도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심지어 작아서 쉽게 죽이고 사체처리도 비교적 수월(?) 합니다.
역사적으로 여러 문명과 문화권에서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태도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건 주로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가를 통해 가늠할 수 있었죠.
동양에서나 서양에서 신생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기 시작한 시점은 다 다릅니다.
고대근동지역부터 아시아를 넘어 남미의 마야 문명 등 영아부터 어린이들을 당대의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의식이 있어 왔다. 기록된 문서적 자료 외에도 고고학적으로도 확인가능한 내용이다. (참고: science.org 기사)
중국에서도 가난한 집안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는 사례가 있었고, 일본에서도 '마비키'라는 이름의 태어난 아이를 바로 죽이는 행태도 기록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한 법적 제제는 없었습니다.
인류의 역사 속 그런 문화를 바꾼 건 무엇일까요?
계몽주의가 인류를 일깨운 걸까요??
민주주의의 진보가 인권의식을 향상해 준 것일까요?
(미국 역사 속에서 노예해방을 반대했던 것은 공화당이 아니라 민주당이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지금은 민주당이 공화당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모는 경우가 많지만 이게 역사적 사실이다.)
과거 역사 속의 한 사건, 그 사건에서 시작된 운동, 그 운동 아래 여러 국가들이 영향을 받았고 그게 지금의 유럽, 북미를 거쳐 전 세계의 사로잡았다는 가설도 있습니다.
(2) 성에 대한 정책 Policy around Gender
현재 미국을 가르는 또 다른 핵심가치의 충돌 중 하나는 바로 이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입니다.
성인들의 성적지향성, 취향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을 초월한 지 오래이다. 일부 주의 학교에서는 ’ 트랜스젠더‘가 되는 것이 ‘쿨’하고 ‘힙’ 한 것처럼 인식하는 추세도 있다고 하죠. ‘소수자 배려’라는 이름 하에 유치원생들에게 여성의 복장을 트랜스젠더 선정적인 춤을 추는 공연을 한다거나 책을 읽어주는 시간 ‘drag queen story-hour’이 도서관 프로그램으로 진행됩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시절에 이미 ’ 여성적 성향’을 가진 남자아이가 여자의 이름과 대명사로 불려지도록 하는 ‘사회적 전환’을 거치고, 사춘기가 오기 전에 호르몬제 복용을 부모의 동의 없이 진행시킵니다. 일부 주에서는 이런 아이의 선택을 지지하지 않으면 양육권을 박탈하고 사회복지기관이 개입하기도 합니다.
미국의 대표 종교인 기독교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성은 이진법적으로 구분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신이 태초에 인간을 남과 여로 구분해서 창조했다고 믿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이나 ‘캔슬’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과학자들은 성이 생식세포 단계에서 이미 남과 여로 구분되어 있다고 말하죠. 유명한 반종교적 무신론자 리처드 도킨스와 기독교인들이 같은 의견을 내는 흔치 않은 영역입니다.
인구감소 위기를 우려하고 있는 마당에 미성년자들이 미래의 불임가능성에 대한 충분한 인지 없이 성호르몬을 복용하거나 성기절제수술을 합니다. 미국 공화당/보수파의 관점에서 보면 이건 국가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폭정‘일 수 있겠습니다. 일부는 가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를 파괴/해체하려는 (과거 사회주의국가에서 했던) 움직임이라는 해석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공화당의 시선에서 현재의 민주당은 ‘태아를 죽이기 쉽게 하고, 아이들을 성전환 수술 시키고, 가족을 파괴하려 하는’ 정당으로 취급받습니다. 민주당은 공화당을 ‘인종차별주의적이며 성소수자를 억압하고 한물간 가치관을 옹호하는 ’ 올드타이머 old-timer’로 부릅니다.
그렇게 종교적 바탕이 미치는 가치관의 차이는 미국인이 어떤 대통령에게 투표할지를 좌우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은 국제정세에 영향을 미치죠.
지난 200년간 인간은 종교가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시키려 갖은 노력을 했지만 아직도 종교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유명한 무신론 작가 리처드 도킨스가 스스로를 ‘문화적 크리스천’이라고 말한 시대입니다.
종교를 모르면 이 세상의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해 볼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모르면 미래라는 현재의 연장선 역시 알기 어려워집니다. .
이 글을 쓰는 이유를 영어로 간략하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For your informed decision
제대로 알아야 합리적인 선택이 가능합니다.
합리적이라는 단어를 ‘지혜로운’이나 ‘이상적’이라는 단어로 바꿔도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에 대한 이해를 높일 때,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저 ‘열심히 살면 ‘, ’ 착하게 살면 ‘, ’대충 살다가 가면‘ 되는 게 아니라고 주장해 볼 수 있겠네요.
팔이 가늘다고 열심히 푸쉬업만 하면 팔이 두꺼워질까요?
학창시절 팔이 가늘어서 두꺼운 팔을 만들어보겠다고 하루에 푸쉬업을 백개에서 이백개를 하던 시절이 있어요. 가슴근육만 두드러지게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자세에 따라 다른 근육을 사용한다는 걸 몰랐던 때입니다.
음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면 좋은 이유:
현실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
오해는 풀어두면 좋은 거죠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만난 여러분께 귀중한 시간을 할애해서 종교에 대한 오해 9가지를 풀어보는 것을 권해봅니다.
(시간이 될 때 추가해서 업데이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하 문어체로 시작합니다.
오해1: 한 사람의 세계관은 오직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
나 역시 종교에 대해 큰 관심이 없이 자라온 환경에서 ‘주입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기독교인이 되고 불교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불교로, 무교의 가정에서 자란 이들은 무교로.
하지만 이 모델은 너무 단순화된 것이란 걸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었다. 나의 부모님은 둘 다 무교의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교 때 기독교인이 되었다. 두 분의 부모, 나의 조부모님도 나중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결국 태어난 환경의 세계관이 아닌 다른 세계관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슬람이었던 사람이 신비한 체험을 한 후 기독교인이 된다거나, 이슬람 포교자가 기독교인 친구와 수년간의 토론 끝에 기독교인이 된다거나 하는 사례들은 의외로 적지 않았다.
물론 반대 측 사례도 있다. 니체도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것으로 알려졌고 리처드 도킨스도 천주교 기숙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히틀러도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다녔다고 하니.
일단 흔히 듣게 되는 그 주장. ‘사람은 자라온 환경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는 과도한 단순화를 담은 해석은 감히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오해2: 종교관은 삶의 지극히 작은 영역만 차지한다.
내가 종교에 대한 연구와 비슷한 관심이 생긴 것은 삼십대가 되어서이다.
나의 세계관에 대해 다른 이의 세계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된 건 다름 아닌 연애로부터였다.
내가 좋아하는 상대 (혹은 나를 좋아하는 상대)가 나와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을 때 그릴 수 있는 미래가 한정적이라는 걸 자각하게 되는 기회가 있었다. 그건 현재와 과거,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르게 하고 있었다. 생명과 죽음, 사랑과 증오, 행운과 불운, 고통과 즐거움, 부유함과 빈곤함 등 많은 영역에서 해석을 달리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표면적으로 ‘무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가정해 보자. 무교인 사람은 한국의 ‘전통’은 문화의 일부라고 믿는다.
그리고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결혼날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종교가 없는 무교 가정을 보자.
이 사람이 나의 ‘운명의 그녀/그’인지 불안한 당사자는 홍대에서 친구들과 함께 용하다는 ’점‘을 보러 간다. “재미삼아” 사주를 본다. 거기서 들은 얘기가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겪는 (혹은 연애 중에 겪었던) 일들과 맞물려 돌아보게 된다.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필연‘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무교 가정의 부모는 ’ 길일‘(吉日)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날은 좋고 어떤 날은 나쁘단다. 이 ’좋은 날‘은 결혼식, 이삿날부터 기타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 가정의 부모는 다른 조건을 중시한다. ‘일요일’은 안된단다.) 일요일은 피해서 길일을 찾아본다.
결혼을 했다. 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골라야 한다. 그런데 또 이름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시댁 어머니가 아는 ‘좋은’ 철학관에 가서 ‘좋은 이름’을 받아와야 한단다. 미신을 믿는 건 보기 안 좋으니 ‘할아버지’가 정해준 좋은 이름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때 무교인 남편/아내가 영화감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극본이 완료되고 로케이션가 확정되고, 배우 섭외가 완료되었다.
영화는 거의 언제나 대표적인 ‘리스크가 높은 투자’이다. 성공 확률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불안하니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고사’를 지내며 시작한다.
양가 부모님들 중 누군가 돌아가신 상황을 가정해 보자.
명절이 되고 제사를 지낸다. 딱히 종교적인 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냥 한국의 전통문화라고 생각하며, 고인을 기리는 방법이라고 믿으며 매해 그렇게 제사를 지낸다.
자, 무교 가정의 그/그녀가 생각하는 한국 전통문화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유교와 도교가 ‘주역사상’이나 ‘풍수지리’가 숨어있다. 무교 가정이 따르는 전통 속에도 종교가 숨어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역시 한국‘전통‘이라고 하기엔 따지고 보면 외국종교이다.
재미로 본다는 다른 것들을 살펴보자.
점집이 아닌 타로인가?
타로의 유래에 학술적 근거가 있는 가설을 살펴보자. 원래 중세(15세기) 이탈리아 귀족들의 유흥으로 시작된 이 카드 Tarocchi의 디자인 컨셉은 기독교가치관이 반영된 중세 예술과 문화의 산물이었다. 그러다가 18세기 무렵 신비적 요소를 더해 지금의 ’타로점‘과 같은 형태로 발전된 거다.
별자리 운세
서구문명의 점성술은 멀리 보면 기원전 2000년 대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바빌로니아(바벨론)의 신화적 세계관이 개입된다. 그 위에 고대 이집트의 점성술이 얹혀 이집트신과 영혼의 사후세계에 대한 세계관이 입혀져 있다. 그 위에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가 얹혀 플라토와 스토이시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운명론적 관점이 더해진다.
동양에서는 인도의 점성술은 베다 경전과 연관되는 기원에 대한 가설이 있고, 중국의 점성술은 도교적 해석이 개입된다.
요가
심신의 건강에 유익하다는 요가는 어떤가? 현대인들은 단순한 스트레칭과 명상으로 해석하지만 그 이면에는 힌두교와 불교가 섞여있다.
요가의 초기 역사적으로는 인도의 힌두교 수련으로 시작되어 있다. 윤회의 굴레 속 ’해탈‘을 궁극적인 목표로 하는 수행도구이다. 기원전 1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베다교 경전에서 시작되어, 우파니샤드 라는 철학적이지만 브라만(우주적 영혼)과 아트만(개인적 영혼)의 개념을 가지고 우주와 인간, 나와 세상을 일치시킨다는 걸 목표로 한다. 힌두교의 다신론적 세계관이다. ’카르마‘니 ’차크라‘니 하는 것들이 다 힌두교적 개념이다.
일본 만화 <나루토>의 ’차크라‘나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말하는 ‘전체는 하나고 하나는 전체이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교로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무 종교의 영향 없이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종교를 모르면 그냥 ‘문화‘라고 치부하기 쉽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그 안에는 종교관이 숨어 있다.
동양의 절/사찰이나 유럽의 성당 같은 건축양식부터, 클래식이나 크리스마스 캐럴 같은 음악까지. 심지어 단순한 메이저 스케일의 ‘도-시-라-솔-파-미-레-도’가 리듬을 조금 넣으면 유명한 찬송가의 멜로디라는 걸 알게 된다. “도-시라-솔~파-미-레-도” (기쁘다 구주 오셨네/원제: Joy to the World)
다리를 삐어서 혹은 허리가 아파서 한의원에 간 적이 있는가? 그 기초엔 중국 도교의 음양오행이란 세계관에서 유래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가 아니다.
’피하고 싶으면 알아라‘ 라고 하고 싶다. 모르면 피하지도 못하고 흠뻑 젖는다.
오해3: 모든 종교는 표면적으로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
자신을 무교라고 표현 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쉽게 동의하기 쉬운 주장이 바로 이것일 수 있겠다.
종교는 다 똑같은 거 아니야?
사람이 미지의 세계, 불확실한 삶 속에서 의지할 곳을 찾기 위해 만들어낸 것.
위로가 필요해서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들이 믿는 것.
이건 마치 야구를 모르는 사람이 투수의 손에서 포수의 미트까지 공이 갈 수 있는 궤도가 하나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야구 그거, 어차피 투수의 손에서 포수에게 날아가는 걸 타자가 맞추는 거 아니야?’
야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패스트볼, 커브, 체인지업 등 다양한 구종과 구속의 변화를 이야기할 수 있다. (본인은 야구 마니아가 아니라 여기서 멈춘다)
흔히 듣는 ‘위로가 된다’의 관점에서 현존하는 4대 종교를 비교해 보자.
아주 간략하게.
간략하게만 설명해도 다른 점이 보인다면 세세하게 들여다보지 않아도 얼마나 다른 지 알 수 있으니.
지리적으로 힌두교와 불교를 같은 구역에 놓고, 유대교-개신교-천주교를 같은 구역에 놓을 수 있겠다. 이슬람은 좀 특이하니 개별적으로 다뤄보자.
힌두교
힌두교 문명에서는 ‘카스트’가 존재한다. 힌두교의 윤회 사상과 카르마가 이걸 합리화시키는 근간이 된다. 지금 나의 삶 속에 어떤 고민/고통/불행이 있다면 그건 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이다. ‘이번 생애’의 내가 뭘 잘못했거나 ‘지난 생애 (전생)‘의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다.
원인을 찾았다.
내가 원인이다.
그럼 답을 얻은 것 같은 생각에 고민이 멈출 수 있겠다.
그게 진정한 위로일지는 모르나, 내 책임이니 어쩌겠는가. 카르마이다. 내가 뿌린 씨를 내가 거두는 거다.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으면 논리적이기도 하다.
사후세계의 개념은 기독교보다 복잡하다. 일단 ‘영혼들’이 선행의 대가로 쾌락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Svarga가 있다. 신들의 왕 Indra가 다스리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곳은 기독교의 천국처럼 영원한 곳이자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임시거처이다.
이 세계관 속 궁극적 희망은 무엇인가?
이번 생애에 최대한 ’잘‘해서 지난 생애에 감점요소를 극복하고 다음 생애에 좀 더 나은 존재, 나은 삶을 얻는 것.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삶과 죽음의 반복되는 굴레 속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어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주가 나이고 내가 우주라는 깨달음의 실체화를 달성하는 거다.
어떤 의미에선 유아론(solipsism/唯我論/)과 유사성이 있기도 하다.
특별히 유대-기독교나 이슬람과 비교하지 않겠다. 너무 다른 세계관이라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관의 차이는 그들이 사회체계와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다뤄보겠다.
불교
원시불교는 힌두교 세계에서 살아가던 한 현자의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한국어 발음이 얼마나 원어 발음과 가까울지는 상상에 맡긴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사람을 창시자로 본다.
한국에서는 석가모니, 그 석가모니는 중국어인 [shi jia mo ni]의 [shㅡ지아 뭐 니]인데, 원어의 [샤카무니], 샤카 족의 현자란다.
고타마 붓다이다.
그의 생애, 활동 연대에 대한 의견은 두 가지로 갈린다.
전통적으로 붓다의 사망지로 알려진 국가들의 Theravada 전통에 따르면 그의 죽음은 기원전 543년으로 그의 생애를 기원전 623년부터 기원전 543년으로 본다. 마하야나(Mahayana) 전통에서는 그의 생애를 기원전 490년에서 기원전 410년으로 본다. 고고학적 자료등이 뒷받침하는 건 ’kushan dating’으로 기원전 411년부터 400년이다. 일단 그 생애에 대한 의견이 약 200년의 갭이 있다는 게 신경 쓰이지만 일단 넘어가자.
힌두교에서 나-자연-신의 일체를 주장했다면 불교에서는 ‘무’와 ‘허’를 주장한다.
신이 있다면 왜 인간사의 고통이 있냐는 귀족양반의 연민 어린 질문에서 시작되었나 보다.
처, 자식을 떠나 득도의 길을 걷고 모든 게 다 꿈같은 거라는 결론을 내린 것 같다.
여러 영역의 문제의 상관관계를 잇고 통합적인 체계로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한다.
원시불교가 창시자의 손을 떠나 두 파벌로 나눠진 제자들에 의해 서로 다른 ’라인‘의 불교로 발전한다.
그 과정에 고타마 싯타르타가 부정한 요소들이 다시 들어오거나 현지 종교나 토속신앙 등이 덧입혀져 지금의 불교 세계관을 갖게 된다. (중국의 경우, 도교의 요소가 더해진다.)
내가 들어본 질문 중 하나이다.
“불교의 극락이나 기독교의 천당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
기독교적 세계관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선 고타마 싯다르타, 붓다는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는 걸 강조하고 싶다.
(Aggi-Vachhagotta Sutra)
붓다는 바카오타라는 수도승에게 영혼의 존재, 우주의 영원성과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을 받는다. 그는 답변을 하지 않고 그런 질문들은 ‘깨달음’/해탈이나 고통의 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답변했다고 전해진다.
붓다가 강조한 것은 어쩌면 가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현재 인간으로서 경험할 수 있는 삶 속에서 도덕적 자기발전에 초점을 맞추게 하고 영혼이나 ‘신’ 같은 존재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지게 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붓다가 ‘절대자’, ’창조자‘와 같은 신적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무신론자‘였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세계관의 차이가 보인다.
[1] 붓다의 세계관 속의 ’신들‘(gods/영적존재 혹은 귀신)은 존재의 영역에 속해 있다. 기독교의 초월적 절대자인 신과 달리 창조자가 아니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카르마, 고통과 윤회의 굴레 속에 있다. 이런 ’신들‘은 기독교의 영원하고 전지전능하다고 묘사되는 신(God)과 다르다.
불교가 한 때 유행한 뉴에이지 문화와 상승효과를 이뤄냈던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 ’남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에게 등불이 될 것‘을 이야기 해서이다. ’깨달음’의 주체는 ‘나의 밖’에 있는 초월적 존재나 그의 도움이 아니라 나 스스로이다.
[2] 붓다의 가르침에는 힌두교 개념의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 ’아나타anatta’를 부정한다.
[3] 붓다가 가르치는 ‘도덕성‘의 중요함은 카르마를 기초로한 ’연기’/연관성 때문이다. 내가 하는 악행이 나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유대-기독교나 이슬람에서는 선의 기준을 신에 두고 ‘도덕적’ 행위는 ‘신이 원하기 때문’ 이라고 이야기한다. 기독교에서 선의 기준은 곧 신이다. )
현세/이번 생애에서 아무것도 잘못한 일 없이 영아가 죽었다고 치자. 그 부모가 잘못한 것도 없다. 그 아이가 잘못한 것도 없다. 하지만 이 세계관에선 ‘전생’이 있기 때문에 그 전의 삶에 뭔가를 잘못해서 그런 대가를 얻은 게 된다.
[4] ‘원시불교’ 사상에서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간지의 종교. 사실 신이 없는 세계관인데 종교라고 부르는 게 좀 어색하다.
“천국에서 (신을) 섬기느니 지옥에서 다스리겠다.(Better to reign in hell than serve in heaven)”
이 존 밀튼의 실낙원(Paradise Lost)의 문장이 멋있게 느껴지고 공감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독립적인 성향 탓에 신에게 종속되어야 하는 듯한 기독교가 맘에 안 드는 이들이 불교를 매력적으로 느끼는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도덕적인 삶의 이유는 ’그게 나에게 좋아서‘이다.
굳이 신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도덕적으로 살지 않으면 그 악행의 댓가가 나에게 돌아온다. (물론 그래서 ’기원‘의 문제를 답해주지 못한다)
[5] 그런데 우리가 아는 불교에는 뭔가 신적 존재가 있다.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불교는 시간이 흘러가며 ‘다른 것’들이 첨가됐다.
원시불교, 부파불교, 소승불교, 대승불교 등으로 나라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했다. 교리와 의식이 지방에 따라 다르게 발전되어 ‘불교’의 범주가 명확하지 않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관음신앙이다.
불교 경전 중 하나인 <법화경法華經>에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소원’을 이뤄준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관.세.음” 세상을 보고 고통에 처한 ‘중생(사람)’의 소리를 듣는 보살이라는 거다.
불교 세계관에 기독교의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는 없다.
사람이 깨달음을 얻고 된 ‘레벨업’해서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되는 게 보살이다.
그런데 이 보살은 신은 아닌데 인간을 도와줄 수 있는 존재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통일 신라 시절 누군가(주로 역사 속 인물) 관세음보살에게 소원을 빌었거나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뤄졌다는 민간의 ‘경험담’이 이어져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여러 요소들이 첨가되어 현대 불교가 있게 되었다.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4915
이런 사상들이 불교문화권의 국가들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유대-기독교(개신교+천주교)
유대-기독교의 세계관은 이 세상에 대한 묘사가 다르다.
앞서 간략하게 살펴본 불교에서 세상의 모든 것의 연관성을 연기缘起라는 단어로 설명해 냈다면, 기독교에서는 인과관계가 명확하다. 더 나아가 기승전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역사의 흐름, 방향성이 존재한다.
우주의 시작
Ex-nihilo (물리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간과 공간과 우주가 시작된다.
이건 다른 종교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힌두교에서는 성스러운 소의 피와 사체, 신들의 사체에서 시작된다.)
우주라는 공간 속에서 천체학(천문학)적 존재들이 먼저 생기고 지구에 빛이 드는 환경이 조성된 후 육지가 생기고 식물이 생기고 동물이 생긴 후 마지막 단계에서 인간이 등장한다.
유대-기독교의 경전에서는 인간에 대한 두 가지 설명이 눈에 들어온다.
인간은 다른 존재들과 달리 특별하게 창조되며 ‘신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과 여로 구분되어 만들어졌다는 생물학적 성에 대해서 언급을 하며, 그 최초의 한쌍을 대상으로 인간사의 처음부터 ’ 결혼‘이라는 제도가 신을 통해 부여됐다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유의지가 부여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타락’ 하기 쉬운 ‘악의 잠재성’을 가진 존재이다.
’아담‘ 이란 히브리 단어가 ’인간/인류(human-being/humankind)‘를 뜻하기에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자연에 대한 시선
기독교 세계관 속에서 신은 자연과 별개의 존재이다. 힌두교 세계관에서 자연과 신이 하나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기원전 1500여 년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진 두 번째 경전에서 이미 ‘신’과 피조물이 별개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하늘의 해, 별과 달 같이 ‘신이 만든 것’을 신으로 ‘숭배’ 하지 말라고.
당시의 태양신을 섬기고 자연을 숭배하던 주변 문명과 대조적인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구분한다.
성경에 따르면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으로 불리게 되는 히브리족은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있다. 십계명이란 것으로 알려진 이 규율이 그들의 첫 ‘법’이 된다. 그리고 세부규정들이 추가되어 주변 문명과 다른 생활양식을 가지고 고대근동지역에서 살아가게 된다. 주변 국가의 종교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종교적 규칙 외에도 어떤 음식들은 먹으면 안 되고 어떤 옷들 입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런 그들의 생활양식은 고고학자들이 이스라엘인들의 거주지역을 판명할 때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다윗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의 탐사에서 돼지뼈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종교 경전의 구성
이스라엘 백성의 관점에서 쓰인 책들이 하나 둘 모여 ‘타나크‘라는 이름으로 묶인다. 기독교 성경에서 두꺼운 앞부분을 담당하는 ’ 구약‘이라고 불리는 책 모음이다. 보편적인 이야기의 서술구조가 있는가 하면 규칙을 나열하는 듯한 매뉴얼도 있고, 격언들을 모음 지혜서들도 있고, 당대의 ’ 선지자‘라고 불린 이들이 기록한 예언서, 당대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이 적은 역사서, 그리고 순수문학(?)인 시가 있다.
이런 책들을 싸잡아서 다 허구라고 주장하기에는 구약성서의 일부 책의 정보를 토대로 대영제국시절부터 고고학에서 많은 발견이 있었다. 당시 성경 속에서만 기록된 허구의 나라로 취급되었던 니느웨(Ninevah)라는 도시가 구약의 ‘요나서’의 정보를 토대로 발굴되었다. (앗시리아제국으로 현대 이라크북부지역, 터키 남동부, 이란의 서부를 아우른다.)
기독교의 창시자
고대근동 문명 중 약소국인 이스라엘의 종교인 유대교의 경전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되는 시점은 로마제국 시대이다.
이집트, 바빌로니아, 앗수르 여러 강대국의 속국으로 포로생활을 하던 패턴은 로마제국까지 이어진다. ‘팍스 로마나 PAX ROMANA’가 이루어진 시대에 ’ 예수(예슈아)’라는 유대인 목수가 한 지역에서 유명해진다.
이 목수는 귀족 출신 고타마 싯다르타와 달리 ‘평민’이다.
‘이적을 행하는 자’로 알려져 아픈 사람들을 고친다거나 하는 기적을 보여줬다는 로마시대 역사가의 기록이 있다. (그런 기록이 실제 기적을 입증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적어도 당대 사람들이 그렇게 보고/생각하고 기록했다는 이야기이다.)
변두리 지역에서 유명했던 그는 사후에 그 이름을 더 널리 알리게 된다.
유일신을 섬기던 유대교인들 사이에서 자기가 신의 아들이고 신이라는 주장을 한 것이 죄목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에 처해야 하는 신성모독이고 로마인들에게는 로마황제를 위협하는 ‘유대인들의 왕’, 차기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인물로 프레임이 씌워진다.
당대에 가장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형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 역시 종교경전이 아닌 당대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 확인가능하다. )
문제는 그 후이다.
화가 반 고흐가 죽은 후 그의 작품들이 인정받은 것 정도가 아니다.
죽은 그가 되살아 났다는 소문이 도시를 휩쓴다.
죽은 그를 다시 봤다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더 가관인 것은 그렇게 죽었다가 되살아난 후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더 큰 문제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언했다.
유대인들의 예언서에 기록된 그들을 위해 대신 죽을 존재가 자기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이 죽은 후 다시 살아날 거라고 ’ 죽음과의 선전포고‘를 했다.
잘 생각해 보면 이건 꽤 위험한 주장이다.
만약 신흥종교의 교주가 죽었다가 되살아날 거라고 예언을 했는데 그 사람이 되살아나지 않으면 그 신흥종교는 끝난다. 교주가 사기꾼이라고 입증한 게 되기 때문이다.
‘죽은 후에도 자신의 영혼은 계속되어 신의 곁에 있을 것이다.’라는 식의 예언을 하면 아무도 그걸 검증할 수가 없다. 반증불가능성을 확보하기에 보다 안전한 예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신격화하기 위해서 사체를 훔쳤다고 주장하는 것에도 설득력이 크게 부여되지 않는다. 반동자를 처형한 후, 그 반동자가 되살아날 거라는 예고가 알려졌다면 시체를 가져가려는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기도 한다. 누가 시체를 훔쳐가면 담당자가 ‘모가지’이다.
설사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갔다고 해도 그럼 예수가 자기가 가르친 것처럼 ‘신’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게 된다. 선지자인척을 했던 거짓말쟁이 사기꾼을 위해 목숨을 걸 필요가 없다. 죽은 걸 자기들이 확인했는데 얻을 게 없는 상황이다.
C.S루이스라는 영국 작가는 예수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미쳤거나 거짓말쟁이 거나 정말 그가 주장한 것처럼 신이거나.
이 세계관의 최종 스테이지
아무튼 기독교경전의 얇은 후반부 ‘신약성서‘는 그런 예수[예슈아]의 일대기를 4명의 다른 기자가 기록한 책들인 소위 ‘복음서’라고 불리는 책들로 시작되어 ‘요한계시록’이라는 무지막지하게 어려운 책으로 마무리된다. 이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은 약 다섯 가지가 있다.
한쪽에서는 그 책이 그린 ‘미래’가 당시 유대인들이 경험한 예루살렘 파괴에 대한 예언이라는 해석 한다.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이고 현대인이 경험하게 될 미래가 아니라는 거다. 그 반대편에는 인류 역사상의 최후의 날에 대한 예언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개념 중 하나이다. 기독교의 천국은 ‘극락’과 동일한 사후세계가 아니다.
기독교 경전의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두 가지 개념을 포함한다.
예수에 대한 기록 중 하나인 ‘누가복음/누가의 복음서’에서 언급하듯이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Kingdom of Heaven)‘은 이 땅에서 이뤄진다. 천국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의 사랑과 공동체 속에서 느끼며 경험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인들이라면 모두 알 수밖에 없는 ’주기도문‘의 구절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중략)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하생략)“
고어체 때문에 다가오지 않았던 부분은 영어로 살펴보니 확 다가왔다.
…Thy Kingdome come. Thy will be done.
(새번역)..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기를 원합니다.”
이 “아버지의 나라”가 예수[예슈아]가 이스라엘에서 설파한 ‘천국’이다.
성경적 세계관을 살펴보면 전통적으로 대중들이 인식하는 것과 달랐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죽고 나서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이건 인간중심적 해석으로 구분되는데, ‘신 중심적’으로 살펴보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신이 원래 창조한 세계는 ‘에덴동산’ 같은 낙원이었고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이 땅에 지옥이 시작된다. 전쟁과 폭력 등이 그런 ’죄‘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땅에서 지옥을 몰아내고 ’천국‘과 땅이 하나가 된다는 복잡한 해석을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조금이라도 교회학교/주일학교를 다녀본 사람들이라면 꽤 당황할만한 정보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어린 시절 어린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대중적 요약 버전’과 기독교 성경에서 말하는 ‘보다 복잡한 지성인 버전‘의 차이가 왜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는 부분적으로 공감이 되기도 한다.
어린 나이에 고등수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으니 산수를 가르친 것 정도로 비유하면 될까 싶다.
이슬람
이슬람의 최초기원은 유대-기독교와 중복된다.
’아브라함계 종교‘로 구분을 하면 이슬람도 같은 카테고리에 있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꽤나 다른 종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세 가지만 들어보자.
[1] 예수에 대해
이슬람 경전 쿠란에서 [이사]라고 불리는 예수[예슈아]에 대해 역사적 기록과 상충되는 주장을 한다.
쿠란에서는 예수가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선지자로 인정한다. 하지만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하지 않고 ‘알라/신’이 하늘로 데려갔다고 주장한다. (쿠란 4:157-158)
만약 쿠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기존 로마시대를 다루는 역사가들이 모두 틀린 게 된다.
[2] 경전에 대해
이슬람의 종교경전은 모하메드/무함마드가 직접 천사 가브리엘을 만나 23년 동안 받아썼다고 전해진다. 그런 ‘신의 계시’인 쿠란이 최고의 권위를 갖는다.
그리고 하디스/hadith 라는 ‘코멘터리’/주석이 쿠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공식 경전 하나와 그 경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해석서‘가 된다. (기독교에는 종교경전인 성경만 있고 공식적이고 통일된 해석서/참고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
[3] 낙원paradise에 대해
마지막은 이슬람의 사후세계 ‘낙원’에 관해서이다.
수년 전 넷플릭스의 ‘지옥’이란 시리즈를 보고 각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낙원에 대해 조사해 볼 때 알게 된 내용이다.
쿠란에서는 낙원에 가면 모든 무슬림들이 지상에서 결혼한 아내 외에 예쁜 처녀 ’후리houri ‘를 받는다고 적혀있다. (쿠란 44:54, 52:20)
그 후리에 대한 묘사를 일부 설명하면 “크고 예쁜 눈”의 처녀들이다.
참고서(?) 하디스에서 추가로 설명을 하는 것을 살펴보면 “크고 둥글고 처지지 않는 가슴을 가진 ‘진주같은’ 처녀들‘, 이며 ’생리를 하지 않고 대소변도 보지 않으며 아이가 없고, 뼛속 골수까지 투명하고, 영원히 젊고 털이 없다고 한다. 하디스 2562번에서는 천국의 사람들에게는 8만 명의 종과 72명의 아내를 선물로 받는다고 설명한다.
불교의 극락이나 기독교의 천국에는 없는 개념이다.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보상’이라 ‘그럼 여성은 무엇을 선물 받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의 천국은 지상에서 얻지 못한, 채워지지 못한 소원들이 이뤄진다고 가르친다. (쿠란 41:31)
여기까지 읽고 모든 종교가 ‘같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오해 4: 한 종교만 맞다고 하는 건 편협적이지 않나요?
포용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반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이성을 활성화시키고 논리를 구동시켜 보자.
수학문제가 있다.
1+1의 답을 구하고자 한다.
2이다.
답이 하나뿐이라고 주장하는 건 편협 적힌 게 아니라 수학에서 정한 연산규칙에 부합한 답이 하나라는 수학적 사실을 이야기하는 거다.
매일 1팩의 담배를 피우고 매일 소주를 한 병을 마시는 고도비만의 환자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회사에서 지원하는 건강검진을 갔더니 여러 수치들을 보고 의사가 말한다.
“술과 담배를 줄이지 않으시면 위험합니다.”
이런 경고를 마주한 이가 다음과 같이 반문할 수 있을까?
‘의사 선생님, 그건 너무 편협한 의견 아닌가요?? 2차 소견을 받아봐야겠어요. 술과 담배를 줄이지 않으면 위험하다고 단정할 수 있나요?’
이런 의사의 경고가 편협하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의 생리학적 여러 요소들과 술과 담배가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적 사실들을 토대로 한 ‘규칙’이 있고, 어떤 행동들은 건강에 유해하고 유익한 걸로 나눌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더 쉬운 예를 들어보자.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엄마는 김영희이다.
그 사람에게 누군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 어떨까?
”김영희 씨만이 당신의 엄마라니 그건 편협적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엄마일 수 있습니다. “
잘 살펴보면 ” 한 종교만 맞고 다른 종교가 틀리다고 말하는 게 편협적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전제가 문제이다.
종교가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의 종교가 다르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 종교가 다 허구라고 믿는 사람들이 위와 같은 주장을 할 뿐이다. 그들에겐 다 ‘픽션’이고 중요하지 않은 ‘취미생활’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건강해지려면 꼭 수영만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나요? 자전거를 타도 되고 농구나 축구, 탁구나 테니스, 배드민턴을 하면 되죠 “
이 정도의 깊이로 종교인들의 종교를 바라보고 있는 게 된다.
좀 더 있어 보이는 말로 바꿔보자.
모든 종교가 같다고 생각한다면 background belief이 깔려있다. 포용적인 것이 좋다고 말하는 그 모습엔 역설적으로 독단적인 모습이 숨어있기도 한다.
이 세상의 ’현실‘에 대해 자신이 올바른 이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다른 이들이 어떤 게 맞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모두 틀리고, 그런 것은 신경 쓸 필요 없는, 궁극적으로는 무가치한 것이라는 생각 깔려 있는지 모른다.
결국 무교인 사람도, 종교가 있는 사람도, “쉽게 검증하기 어려운” 철학적 전제를 가지고 이 세상, 이 세계, 이 현실을 바라보고 해석한다는 거다.
편협한 지 그렇지 않은지는 어떤 걸 믿는지에 달려있지 않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좌우된다. 종교가 있지만 ”무교인 “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종교가 없지만 ”종교인“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이게 중요하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같다고 말하는 건 알아보면 이렇게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의 세계관과 경전의 가르침을 존중하지 않는 게 된다.
오해 5: 종교는 어차피 검증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검증불가능성이란 개념은 중요하다.
어떤 주장을 바라볼 때 그게 틀린 지 옳은지 시험해 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검증가능성은 부정가능성과 가능의미를 갖는다.
아무렇게나 만들어본 예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주장을 생각해 보자.
여러 가지 경험과 사유로 파악해 볼 수 있다. 조부모부터 부모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친구들 간접적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염을 하고, 수의를 입히고, 관에 넣고, 매장/화장/수목장을 한다.
“사실 모든 인간은 죽지 않는다.” 라고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사람은 한 사람의 심장이 멈춘 후 1주일을 기다리면 다시 살아나 두번째 인생을 살게 되고 신선이 되는 게 원래 인류의 속성인데, 이게 잊혀 사람들이 화장을 해서 두번째 인생을 못산다고 주장한다는 가정이다.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려면 고인이 된 누군가를 임종의 시점부터 1주일 넘게 화장을 못하게 하는 것으로 실험해 볼 수 있겠다. 1주일 2주일 한 달이 지나도록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이 주장은 거짓이 된다. 검증할 수 있는 주장으로 “검증해 보니” 아니었다 ㅡ라는 결론도 내릴 수 있다.
이런 검증가능성을 각 종교적의 일부 주장에 적용해 보자.
불교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인간을 초월하여 보살이 된다”라는 주장은 어떨까?
우선 “보살”이라는 것의 정의와 어떤 상태가 보살을 의미하는 것인지 검증가능성에 영향을 미치겠다.
보살이 된 후는 죽지 않는 것인지, 수명이 연장되는 것인지, 아님 물리적 인간의 속성을 상실하고 (혹은 초월한) 환영/홀로그램 같은 가시적이나 만질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건지?
윤회라는 세계관 속애서 “다음 생애“라는 건 어떨까?
1990년생 A군이 2000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가 2001년 새로 환생해서 자유로이 날아다니고 있다는 주장을 가정해 보자. 이 새가 정말 환생한 A 군인지 검증할 수 있는 법이 무엇일까?
새가 말을 하며 A군만이 알 수 있는 사실들을 말한다?
말을 못 하는 발성기관을 가진 새이기 때문에 부리로 나뭇잎을 콕콕 쪼아 ”엄마, 나 A에요 “라고 메시지를 남기면?
전래동화의 일부 슬픈 이야기의 엔딩에 나오는 ”그가 좋아하던 꽃에 앉은 나비“ 류의 현상은 포함되지 않는다.
환생의 속성상,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건 설정상, 검증불가능한 상황이 된다.
믿고 싶어야 믿는 거고 어떤 근거를 가지고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사후세계나 형이상학적 주장은 객관적인 검증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또 각 사상체계/신앙체계/철학시스템 안에서는 앞뒤가 맞도록 말이 되도록 발전 (혹은 설계)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면밀히 들어다 보지 않으면 시스템 내에서 상호모순 되는 것들을 찾아내기 어렵기도 한다.
이슬람
이슬람에서는 쿠란이 천사 가브리엘이 무함마드/모하메드에게 직접 가르쳐준 것들을 적었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쿠란이 최종권위이다.
그리고 사본학적 연구에 따르면 원본을 보고 베낀 사본들이 생겨나고, 그 사본 간의 차이가 발생하면서 문제가 생기자, 후세의 3대 칼리프(지도자) 우스만이 통일된 경전이 필요하다며 다른 사본들을 불태웠다고 전해진다.
즉 현재 배포되고 읽히고 있는 경전의 진실성은 3대 칼리프의 선택에 좌우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건 그저 종교적인 중요성만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이슈로 연결된다. 현대사회의 인권, 혹은 보편적인 도덕관념으로 문제가 되는 이슈들이 여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여성 혹은 아동의 인권에 대한 해석의 권한이 쿠란과 그 해석에 좌우된다.
신이 이렇게 말했다고 적은 무함마드/모하메드의 쿠란. 그리고 쿠란을 해석한 무함마드의 언행에 대한 기록. 그리고 그 기록을 해석하는 해석서들이 이슬람 사회의 가치관이 된다.
무함마드의 13명의 아내 중 가장 어린 나이에 결혼한 아이샤(‘Aisha). 하디스에 기록된 아이샤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6세에 혼인하고 9세에 무함마드의 집에 들어가 산다. 이게 일부 이슬람 사회에서는 아동 혼인을 합리화하는 이유가 된다. ‘신의 직접 계시를 받은 선지자가 저렇게 했으니 나도 해도 된다’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거다.
기독교
한편, 기독교는 검증가능한 종교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을 여럿 보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그런 주장이 담긴 강의들을 여럿 살펴본 적이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기독교는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란다. 앞서 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할 때 훑고 갔지만 여기서 다시 풀어보자.
_역사적 시선에서 검증
일단 예수라는 인물이 실존인물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허구가 된다.
또 고타마 싯다르타/붓타, 무함마드, 공자의 무덤이 있듯이 로마시대에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어 죽었다는 예수의 유골이 있는 무덤이 발견되면 예수의 부활이 허구가 된다. 기독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기록과 부활을 목격했다는 이들의 증언이 핵심이다.
예수가 십자가형으로 죽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다.
‘백마법사’, ‘마술사’나 ‘힐러’ 같은 존재로 추앙받다가 그냥 처형당했다고 가정해 보자. 예언한 대로 자신의 죽음이 찾아왔다 하지만 다시 살아날 거라는 예언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 사람은 선지자/예언자가 아니라 거짓말뿐만 유대교기준으로 신성모독을
하다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한 인간일 뿐이다. 유일신 야훼/여호와를 섬기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를 신격화할 이유가 없다.
로마인들은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신들을 숭배했다. 사회문화와 경제 속에 스며들어있는 그들의 다신교를 굳이 식민지의 유일신교로 교체할 필요가 없었다. 다신교 세계관 속에서는 황제가 신격화될 수 있었다. 더 높은 권위와 권력이 정당화되는 시스템이다. 그걸 굳이 귀족이나 평민이나 노예도 같은 가치를 지닌 동등한 존재라고 믿는 가치체계를 도입할 필요가 없었다.
기적의 가능성을 배제하면 그 밖에도 다른 영역에서 상호모순 되는 문제가 많이 생긴다. 그래서 이게 물질주의나 환원주의적 세계관을 지닌 역사학자들에게 난제가 되어 석연치 않은 다른 가능성을 찾게 하는 이유가 된다.
_과학적 시선에서의 검증
예수(예슈아)가 핵심이지만 다른 검증가능성의 영역이 있다.
이건 유대교를 포함한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과학적 검증가능요소이다.
어떤 이들은 우주의 시공간에 시작점이 없었다면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의 시작이 붕괴되어 신빙성에 더 큰 타격을 입게 될 거라는 주장을 한다.
(물리학자 피터 앳킨스와 천체물리학자 휴 로스와의 토론 중 언급된다. 그런 휴 로스 박사가 천체물리학적 관점 해서 해석하는 창세기는 참신하다.
창세기로 불리는 유대교 경전의 첫 책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신이 세상을 창조하는 걸 묘사한다. 그래서 빅뱅이론이 기정사실화 되면 여러 종교 중 유대-기독교적 세계관을 지지하는 게 된다. 당시 빅뱅이론을 지지하는 관측결과들을 통해 이 이론의 신빙성이 높아지던 때, 빅뱅이론을 반대했던 과학자들이 제시했던 이유 중 하나이다. 당시의 <네이처>지의 편집장은 이 과학이론은 종교인들에게 너무 유리해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물론 “어차피 가능성은 반반이잖아요. 뭐가 그렇게 대단한가요?!”
유신론 대 무신론. 토론에 참여한 과학자들 사이에서 종종 보게 되는 반응이다.
그러면 마주할 수 있는 반응은 ’맞췄다는 건 중요하지요.‘
빅뱅이론이 주류의견이 되기 전에 과학계에선 우주는 늘 존재해왔다고 생각했다. 만약 20세기 과학자들이 기독교세계관을 좀 더 진지하게 바라봤다면 현대우주론의 발전의 속도가 달라졌을 거다.
오해 6: 신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지적으로 게으른 행위이다.
위에서 주관적인 경험, 체험의 영역이 아닌 역사학과 천문학의 영역애서 일련의 정보들을 통해 검증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는 종교가 기독교라는 주장을 살펴보았다. 잠시 특정종교가 아닌 두 가지 가능성으로서 바라보며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유신론’과 ‘무신론’이라는 관점에서이다.
특정종교에 대해 토론하는 것 이전에 ‘신에 대한 믿음과 과학은 공존할 수 있는가?’ 라는 주제가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된다. 그렇게 되면 앞서 다룬 역사학이나 천문학이 아닌 다른 과학의 영역에서도 배제법(排除法)의 관점에서 선택지를 줄여보는 방법을 사용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일단 현대사회에서 신을 ‘지우는데’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오해받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시작해보자.
“진화론적 매커니즘이 있으니 초월적 존재(신)은 불필요하다.”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시작 자체가 잘못된 이분법으로 시작하긴 하지만 잠시 그 부분은 넘어가보자.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진화라는 과정을 사용하지 않았을 거라는 전제에 문제가 있다)
천문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시작점이 있었다는 게 그 시점 이전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걸 시사하고, 그 가능성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주하고 무신론을 버리게 된다.
그 반대진영에서는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마법같은‘ 상상력이 풍부한 과학자들의 가설들이 떠돈다.
한편 생물학적으로 특정기관에 대해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 일부는 한 기관의 복잡성이나 목적성을 마주하며 ‘랜덤’한 돌연변이와 ‘적자생존’만으로 이걸 설명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며 무신론을 버리게 되었다는 증언을 보았다. 그 중에는 눈의 기능이나 시각세포를 연구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진화론 편에서 다룬 바 있는 전혀 단순하지 않는 ‘단순세포’의 복잡한 구조와 기능 등 역시 다윈주의진화론의 설득력을 잃게 만드는 발견이었다. 단순한 것들이 진화해 복잡한 것이 되었다는 진화론의 프레임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한 줄 알았던 것들이 과학의 발전에 따라 복잡성을 드러낸 거다.
분자생물학에서도 생물의 진화가 시작되기 위해 필요한 ‘첫 생명체’의 화학적 결합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게 현실적이라고 이야기 한다.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그런 걸 ‘우연히’, ‘랜덤’하게 생겨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마주하게 되는 거다.
알면 알수록 기존 진화론의 가설과 전제를 무너뜨리는 것은 지질학에서도 ‘캄브리아기 대폭발’이 그렇다.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이 갑작스럽게 출현한다. 참고로 다윈은 더 많은 화석이 발견될수록 단순한 것들이 점진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고 그 반대의 증거가 나타나면 자기 주장이 틀린 게 될 거라고 한 바 있다.
결국 잘못된 이분법 안에서도 배제법을 사용하면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은 ‘미지’가 아니면 ‘초월적 무언가’ 이다. 신이라는 단어를 배제하고 싶은 사람들은 ‘우주’ 혹은 ‘자연’을 주어로 대체한다.
“우주가 우리를 만들었다.”
“자연은 생물을 대상으로 중요한 실험을 했다.”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자연현상이 ‘패턴’으로 보이는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한 (혹은 복잡한) 패턴과 ‘의미가 있는 문장’이나 ‘의도가 보이는 설계’는 다르다.
작은 우연들이 긴 시간동안 무수히 쌓이면 그게 지금의 복잡한 지능을 지닌 우리 인간이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아무 것도 없었는데 모든 게 생겨났고, 그 환경 속에서 처음부터 복잡한 것들이 생겨났다.
그 주장은 ‘모든 게 가능한 신’이 있다는 것만큼이나 초자연적인 무언가를 믿는 게 아닐까?
신의 속성이 ‘처음부터 존재했고 모든 걸 만들 수 있다’라면 그 신이 이 모든 걸 만들었다고 믿는 건 오히려 논리적이 된다. (신의 속성을 받아드리는 게 어려울 뿐이다.) 반면에 지능도 능력도 없는 ‘자연’이 이 모든 걸 만들어 냈다고 믿어야 한다면 그게 논리적으로 커다란 빈칸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소위 ‘빈칸의 신(God of the Gap)’이라고 부르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니 신이 했어!”라는 주장이나 “어떻게 되었는 지 모르겠지만 신은 아니야!” 라는 주장이나 비슷하다. “어떻게 일어난 일인지 모르겠지만 우주/자연이 그렇게 했어” 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천체망원경으로보나 초미세현미경으로보나 신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하는 이들은 신의 존재의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 그 전제 때문에 다른 가능성을 선택하고자 한다.
기적은 어느 쪽에도 필요하다.
무신론이나 유신론이나 마찬가지이다.
오해 7: 기독교는 반인권적이다.
자연을 보나 역사를 보나 힘의 논리는 매력적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이고 패권주의적인 힘의 역사였다.
종교적으로는 늘 권력자가 신의 편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나 로마제국의 황제는 신이자 신의 화신/대변인이었다.
중국의 천자(天子)나 황제도 마찬가지이다. 주나라 시대부터 “천자”가 군주를 칭하는 정식명칭이 되어 ‘하늘’로부터 권력을 받아 통치하는 ‘하늘/신’의 아들이라 이름의 ‘천자’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즉 신이 권력을 주었기 때문에 신은 권력자의 편인 것 같은 인식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민중의 의식은 통치에 유리했다.
하지만 약자에 대한 시선을 달리하는 관점이 역사 속에서 생겨났다.
유대인들의 경전에서 신이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들의 편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고아와 과부들을 위한 정희를 실현할 것”(신명기10:18)이고 “고아의 아버지이자 과부들의 수호자”(시편 68:5)라고 기록된다.
이런 유대교의 신에 대한 묘사 위에 개신교의 신약성경에는 ‘약할 때 강하다’(고후12:9-11)라는 이상한 주장마저 더해진다.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는 이야기부터 ‘적을 사랑하고, 욕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증오하는 자들에게 선행을 행하고,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한다. (마태5:38-39,43-44).’
이런 가치관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 전쟁은 할 수 없는 국가가 된다.
프레드리히 니체가 비평한대로 대로이다.
약자들을 위한 종교.
역사의 시곗바늘을 좀 더 돌려보자.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약자는 보호 받아야할 대상이 되었다.
누군가 약하다고 괴롭히면 안된다는 것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조할 수 있는 문명이 된 거다.
그리스 로마 문화에 매료되어 역사학자가 된 영국의 작가 톰 홀랜드(Tom Holland)는 <도미니언>이라는 책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약자에 대한 시선’을 바꾼 게 1세기 로마에서 발현된 기독교라고 주장한다. 그전까지 서구문명에서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것은 당연했다. 시저/카이사르나 알렉산더 대왕은 영토를 확장하며 전쟁을 일으킬 때 일어난 살상에 대해서 후회나 아쉬움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로마제국시대에 일어난 ‘기독교 혁명’이 유럽에 퍼져나가 서구문명의 근간에 기초 가치관으로 자리잡았다는 주장을 한다. 그 근원을 계몽주의나 프랑스혁명으로 그 근원을 찾기에는 그들이 선택한 처형과 그 폭력적인 방법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역사 속에서 사회적 약자와 자신을 동일시 하는 신은 기독교의 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인류의 역사 속에 전쟁이 사라질 정도로 인류가 급작스럽게 선해지지 않았다. 그런 인류의 반복되는 타락은 예상하기 어렵진 않다. 기독교 세계관 속에서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존재하며 그게 ‘잠재적 악’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결국 전쟁과 폭력이라는 인간의 실패 역시 기독교 경전의 구약에 기록된 것처럼 반복될 뿐이다.
흑인노예제도를 살펴보자.
찰스 다윈은 억울하긴 하겠지만 생물학적 이론인 진화론을 사회학 버전으로 적용시킨 ‘사회진화론’이 바탕이 되었다. 계몽주의철학은 평등과 박애를 슬로건으로 삼고 ‘인간에게 있어야 할 보편적인 권리’을 이야기 하는 듯 했지만 그들이 말하는 ‘인간’의 범주에는 유럽인들을 포함시켰을 뿐이다. 그렇게 계몽주의 철학은 식민주의, 제국주의를 멈출만한 힘이 되지 못했다.
뒤늦게 영국에서 흑인제도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영국의 정치인이자 박애주의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와 그와 동조하는 상류층 기독교인들이 노예제도폐지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를 필두로 정치권에서도 이런 주장이 논의가 되었고 이런 무역이 기독교적 가치관에 얼마나 반하는 지 설파한다. 그는 국회에서 노예무역을 폐지하자는 법안을 내고 1790, 1792, 1793년 계속해서 투표를 통해 거부당한다. 거부하는 이들은 흑인들의 생물학적 열등함과 경제적 손실을 이유로 댔다. 1804년이 되서야 그의 법안이 통과되고 영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단계가 시작된다. 1883년의 Slavery Abolition Act를 통해 ‘대영제국’의 노예제도가 막을 내린다.
경제적 이윤을 초월 할 수 있는 초월적 가치관과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영국과 유사한 논쟁이 일어난다.
경제적인 손실과 인종의 열등함을 이유로 노예제도의 타당성을 옹호한다. 일부 기독교인들도 그런 사회적 관점에 동조하여 노예를 탄압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어떤 노예주인들은 흑인들에게 성경책을 주지만 ‘노예성경’이라는 버전의 편집된 버전을 지급한다.
모세가 이집트로부터 탈출하는 내용이나 노예도 예수 안에서는 다같은 ‘형제’라는 이야기를 하는 구절들은 삭제된 버전이다.
1854년에 창립된 미국의 공화당은 역사적으로 ‘반(anti)노예제도’ 단체를 기초로 이루어졌다. 공화당은 노예제도가 기독교와 미국 민주주의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아브라함 링컨은 공화당(Republican)에서 처음 당선된 미국의 대통령이다. 그런 공화당은 점점 더 많은 크리스천 노예폐지론자들을 끌여들였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어긴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렇게 미국의 수정헌법 제13조로 노예제도를 금지하고, 제14조, 제15조를 통해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했다.
다시 지금 우리 시대까지 돌아와보자.
과거를 돌아보면 사회 속의 개별안건을 살펴보면 ‘기독교인’인 개인이나 외적으로는 ‘기독교단체’인 집단이 흑인을 차별한 사건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기독교 가치관’을 따라 그렇게 한 게 아니라 따르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 된다.
이건 서구사회의 기독교 가치관이 제시한 인권개념의 일부 사례이다. 이런 가치관들이 법에 반영되어 ‘평등’이란 이름 하에 더 많은 범주가 포함된다.
오해 8: 하지만 종교가 성소수자를 탄압했잖아요.
유대교에서는 ‘남색’하는 자들이란 이름으로 동성애를 금지하고 동성애자들에 대한 처벌을 명시한다. 구약성경의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면 기독교로 넘어와서는 어떻게 되었나?
구약시대에서 신약 시대가 되었다고 갑자기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는다. 신약성서에서도 로마서(1:26-27), 고린도전서(6:9-10), 디모데전서(1:9-10)에서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으로 다룬다.
생물학적으로 ‘자연법칙(natural law)’에 어긋나며 신의 형상은 ‘남과 여’의 결혼 안에서 구현되는 설계가 존재한고 주장한다.
잠시 사회를 살펴보자, 미국을 살펴보면 보수세력이 성소수장를 탄압한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소년은 울지않는다> 같은 영화에서도 드러나는 테마이고, 한 때 영화 속 코미디 요소로 늘 등장하는 게 동성애자 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다른 종교문화권과 비교해보자.
힌두교 국가에서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선
힌두교 경전에 직접적으로 동성애를 금지하는 구절이 없다.
카마수트라 같은 텍스트에는 동성애적 행위를 묘사하기에 당시에도 이런 행위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인도라는 국가의 형법(section. 377)을 보면 2018년 전까지 동성애는 ‘비非자연스러운(unnatural)’ 행위로 간주하고 차별했다 10년형 혹은 종신형과 벌금이 있었다.. (2018년이 되어 철회된다)
이슬람권 국가에서 동성애를 바라보는 시선
이슬람 법 ‘샤리아’ 에서도 동성애를 불법으로 정하고 처벌한다. 그 근거는 쿠란과 하디스로 한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선 태형, 구금, 사형이 이르기도 한다. 이란에서도 샤리아 법으로 사형을 이야기한다. 특히 항문성교를 포함할 경우. UAE, 아랍에미리트 연합국도 마찬가지다. 사형은 없지만 구금, 벌금형에 처하며, 외국인일 경우 추방한다. 파키스탄이나 아프가스니스탄도 동성애를 ‘불법’으로 보는 건 마찬가지이다.
마지막으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하마스가 장악한)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을 살펴보자. 동성애를 하면 구금이나 태형을 마주한다. 반이스라엘운동가 대학생들의 슬로건 “Queers for Palestine”이라는 문구가 무색해지는 현실이다.
미국에서 말하는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이나 ‘처벌’은 어떨까? 진정한 의미에서 탄압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건 아닐까 생각된다. 애당초 동성애자들이 소수자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내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 가치관에서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의 의무가 그들의 법제도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힘의 사회에서는 장애인이라는 소수자도 성적지향성의 관점에서의 소수자도 보호해야하는 대상이 된다. 아이러니하다.
흥미로운 건 동성애를 불법시하는 게 종교-문화권을 넘어서 특정 정치형태에서도 포착된다는 거다. 해체전 소련도 1933년까지 동성애는 구금형에 처했다. 소련정부가 동성애를 ‘부르조아적 퇴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초기에 공산당은 동성애에 대해 일치하는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50-1960년대 모택동[마오쩌둥] 주석이 보다 탄압적인 태도를 취한다. 역시 ‘서구적 퇴폐’로 간주했다. 우생학이 바탕에 있던 나치 독일도 ‘인종적 순결성’을 달성하는데 반하는 행위로 보고 동성애를 처벌한다. 1871년 많은 동성애자들은 수용소로 끌려갔다.
궁금한 점: (만약 존재한다면) 신은 왜 동성애를 금지했을까?
종교적 가르침 외에도 동성애가 객관적 혹은 과학적으로 유해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지게 하는 대목이다.
1980년초의 미국에서 그 답을 일부 볼 수 있었다. 1950년-1960년대에 걸쳐 이루어진 ‘성해방(sexual liberation)’의 여파로 기존 ‘기독교적/전통적’ 성관념이 파괴되는 사회적 물결이 미대륙을 휩쓴다. 그리고 마주하게 된 것은 AIDS Epidemic이었다. 에이즈가 유행병으로 퍼진 거다.
1999년까지 누계로 60만명의 감염사례가 보고된다. 연 5만명이 사망했다.
2019년엔 HIV감염사례가 120만명이 되고, 70만명은 에이즈와 관련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초기엔 게이와 바이섹슈얼 남성이 대부분이었고, 2019년의 통계에 따르면 69%의 HIV진단사례가 게이와 바이섹슈얼 남성이었다. 미국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흑인이 43%의 신규감염율을 보였고, 미국인구의 18%를 차지하며 25%를 차지했다.
마약과 관련된 주사, 의료시설에서의 수혈, 태아 감염 등 여러가지 사례도 감안해야겠고, 이런 수치를 사용할 때 피해자나 환우들을 고려해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AIDS나 HIV가 자연스럽고 나쁜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 과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험한 태도가 되겠다.
이런 사례들을 보고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1) 왜 동성애라는 행위가 이런 병을 발생시키는지 이다.
소위 이성애 간의 성교는 새생명을 만들어내는 반면, 동성애 속의 성교는 왜 죽음에 이르는 병에 이르게 되는가? 물론 생물학적인 디자인(?)/물리구조적으로 부합하는 합체(?)가 불가능해 항문성교를 하는 게 1차적 이유가 되겠지만.
그리고 (2) 긴 인류 역사 속에 존재했던 동성애가 왜 종교적인 맥락에서 금지가 되는 것이 납득이 되었을 지이다.
쾌락을 목적으로 혹은 호기심으로 동성애 행위가 존재해왔고, 발병원인에 대한 인과관계 분석에 필요한 과학적 도구가 부족한채로 인류는 수천년을 살아왔다. 그런 행위를 하는 이들 중 일부는 에이즈에 걸려 사망했을 거고, 그런 것들을 보며 이게 사회번영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라는 것을 국지적으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해보자.
신이 어떤 행위를 금지했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하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
신이 하지 말라는 걸 했더니 ‘신이 벌했다’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걸 다른 시선으로 설명하면 이렇게 될 수 있겠다.
인간을 창조한 신은 인간이 번영할 수 있는 조건과 행동양식을 알고 있다. (설계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인류가 번영할 수 있는 조건을 따르지 않는 것과 그 반대방향의 행위의 가능성이 생긴다.
그 반대방향의 행위를 역행이라고 부르면, 이런 ‘역행’은 순리에 어긋나서 역행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신체기능적으로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하는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는 게 된다.
‘안전하게 콘돔을 쓰면 돼’ 정도로는 반론이 되지 않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도덕적 처벌의 개념이 아닌 인과관계에서 설명하면 이렇게 된다.
자동차를 예를 들면 가솔린 엔진 차량에 디젤을 넣으면 엔진이 고장나는 것이나, 설정된 전압이 아닌 전류를 통해 전자기기를 사용하려는 것과 비슷한 거다. 십자드라이버로 일자나사를 다루는 것과 비슷한 건지도 모른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한다.
여기서 ‘번성’은 개인적, 사회적 번영을 포함한다.
가장 단순한(?) 경제학적 관점에서 설명해보자.
인구가 증가하지 않으면 정부가 노후보장을 하겠다고 운영하는 연금체계는 무너진다. 이 제도는 후손들이 늘어나는 걸 가정하고 세수와 경제활동 등을 가정하고 설계한 것이다. 인구감소는 그런 식으로 위기가 된다.
개인 단위로 내려가보자.
여럿이라 고생할 때도 있지만 혼자가 아니라 둘이면 해낼 수 있는 일이 많을 때도 많다.
그리고 그 둘이 남녀 일 때는, 셋 이상으로 늘어나기도 한다. 가족을 이루고 가족 안에서 부와 경험이 축적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이게 바로 단순한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의 번영 조건이다.
동성애가 나쁘다, 죄다, 이런 얘기가 아니다.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이런 번영의 조건을 달성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그건 인간이 번영할 수 있는 여건’에 부합하지 않으니 ‘비.추.천’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법적으로 금지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 행위 자체가 질병에 이어진다. 이건 무분별한 성적방종이 성병으로 이어지는 걸 바라보는 것과 비슷한 시선이기도 하다. ‘자연적으로’ 인간은 이성애적 관계라도 무분별한 성행위를 하면 성병에 걸리는 존재이다. 그게 일부다처제보다 일부일처제가 더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가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쩌면 존재할 지 모르는 인간의 설계자 (절대적 초월자)가 인간이 이런 ‘금지행위’를 하면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에 금지한 것일 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최근에 이슈가 되었던 “포괄적 차별 금지법”을 이 시선에서 바라보면 종교단체가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조금 더 이해가 될 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종교경전의 금지조항을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라 사회전반적으로 해가 된다는 걸 주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영국의 한 통계를 보면 LGBTQA+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인 브라이튼이 인구증가율이 제일 낮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신약성서에서 예수나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동성애자를 핍박하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을 사랑하라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이다. 이른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는 것은 ’죄인‘인 인간의 한계를 드러나는 것일 뿐 기독교가 자신들의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을 괴롭히라고 가르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_종교적 주장의 한계와 비종교적 사고실험
종교인들이 ’신이 금지했으니 하지 말아야 한다‘ 정도로 밖에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들이 ’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신의 명령이 권위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해서 이다. 그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종교가 없는 이들에겐 초월적 존재가 없고 당연히 신의 명령도 의미가 없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있는 이들의 신의 명령이 ’우연히‘ 사회가 번영하는 조건에 부합할 뿐이다. 그런 ’상상 속 존재‘의 명령이 의미가 있을리가 없다. 무엇보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의 선택을 제약하는 모든 것들은 ‘악’으로 규정한다. 인간의 선택의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선택의 자유가 우선되야 할 필요는 없다. 그건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갖고 있는 이들의 ‘검증할 수 없는 믿음’이다. 어떤 선택은 인간에게 이득이 되지 않고 해가 된다.
모든 선택의 자유가 동등한 존중을 받아야 한다면 사회 통념상 금지가 된 근친상간이나 소아성애도 ‘선택의 자유’에 맡겨져야할 지 논의가 되는 게 현실이다. 인간의 자유는 문명의 역사 속에서 zoophilia,‘수간’이라는 형태로 인간 외의 동물과의 성관계를 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명령에 그런 금지명령이 있다는 게 당시 사회에서 그런 형태의 성관계가 존재했다는 것의 반증이 되기도 한다.
조금 극단적인 상상으로 인간사회를 바라보면 인간 번영의 조건에 대한 고민을 단순화 시킬 수 있다.
90%가 동성애자인 사회A와 10%만 동성애자인 사회B를 상상해보자.
종교라는 절대적 기준이 없으니 인구증가라는 측면에서 바라보자. 경제학적으로도 ‘약간의 인플레이션’이 유리하다는 학설은 인구에도 적용된다. 이 기준에서 A의 사회는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수 밖에 없다.
좀 더 극단적으로 비율을 바꿔보자. 사회구성원의 100%가 동성애자인 국가C와 사회구성원의 100%가 이성애자 국가 D이다. 10년, 50년, 100년의 역사가 흐른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고려했을 때, 어느 국가가 더 강대국이 될까. C국가에서 패션, 예술의 영역에서 아티스트가 많이 나올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구가 증가하지 않는 국가의 미래는 없다.
오해 9: 종교는 쓸모 없다.
신의 존재여부는 증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종교가 있는 이들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다. 사회과학적으로 종교가 있는 이들이 더 행복지수가 높고 정신건강이 좋다는 건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하버드대학, 캠브리지 대학출신의 T.M Luhrman 박사는 <How God Becomes Real: Kindling the Presence of Invisible Others>(프린스턴 대학 출판, 2020년)에서 이런 주제에 대해 조사했다. 이 책은 신의 존재여부가 아닌 신에 대해 하는 기도라는 행위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다룬다.
이 책은 여러 연구를 통해 심리학적 웰빙/정신건강, 신체건강 이란 개인적 영역 외에도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와 커뮤니티의 존재, 삶의 목적과 의미, 자기조절 및 개인발전 등의 영역에서 유익하다는 것에 대해 다룬다.
이 책 외에도 <Soul Searching: The Religious and Spiritual Lives of American Teenagers> (Christian Smith and Melinda L. Denton)는 미국의 십대를 대상으로 진행된 리서치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종교가 십대 청소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정신건강, 도덕관념 발전, 그리고 탄력회복성 등을 주제로 연구했다. 연구는 종교 공동체에 속해있는 청소년들이 삶의 만족도가 높고, 우울 정도가 낮고, 위험한 행위를 하는 경우가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연구에 포함된 종교: 개신교, 카톨릭 위주. 유대교 일부 포함)
그 외에도 <The Spiritual Child: The New Science on Parenting for Health and LifeLong Thriving> (Lisa Miller) ,<American Grace: How Religion Divides and Unites US> ( Robert Putnam and Davide E. Campbell) 등의 적지 않은 연구들에서 이런 주장을 다룬다.
물론 이런 연구에서 조사된 종교는 우리가 뉴스에서 접하기 쉬운 종교의 부정적인 사례인 소위 ‘이단종교’ 등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다. 유대-기독교나 천주교, 불교 등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전통적 종교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종교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원치 않는 종교생활을 강요 받은 이들의 트라우마는 익숙하지만 종교의 유익성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 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마주하면 모두 수긍하게 된다. 유대인들의 교육은 그저 우월한 교육방법이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종교경전을 외우고 여기에 대한 토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유대인들은 불과 0.2%에 되지 않지만 노벨상의 20%를 수상하는 저력을 보인다. 대표적인 에로 알버트 아인슈타인나 리처드 파인먼이 있다.
노벨상 외에도 비지니스 분야를 살펴보면 의외로 많은 이들이 유대인이다. 구글을 공동창립한 세르게이 브린, 블룸버그 사의 창업자이자 뉴욕시 주지마이클 블룸버그, 오라클의 공동창업자이자 전 CEO 래리 엘리슨, 스타벅스의 전 CEO 하워드 슐츠 등이 있다. 랄프 로렌도 유대인이다. 영화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있다.
종교가 있어야 성공한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종교가 제공하는 가치관 속에서 제공되는 정체성,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때 필요한 희망, 재기를 기대하며 이겨낼 수 있는 힘 등을 종교는 체계적으로 제공한다.
만약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또 다른 차원에서의 힘과 지혜의 근원이 될 수 있겠다.
누군가는 예수(예슈아)를 만났다고 하고 만난 후 자기 삶이 달라졌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 이들은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에 크게 기여한 윌리엄 윌버포스에게 영향을 미친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노예무역선 선장이었던 존 뉴튼과 같이 과거의 사람부터 미국의 화학자 제임스 투어 등 시대를 이어가며 존재한다. 원래 조폭이었다가 목사가 된 한국인의 사례나, 야쿠자였다가 목사가 된 일본인의 사례 등은 계속 된다. 어떤 죄인도 새롭게 거듭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있는 종교이니 사회적 약자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악자’에게도 어필이 되는 거다.
(물론 교회를 다닌다며 말하는 친척이나 친구의 블쾌한 행실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반대 사례도 있겠지만 말이다.)
초월적 대상에게 의존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드는 이들도 있겠다. 하지만 반대편 세계관에서는 인류의 탄생도 우연이고 죽음도 우연 속 필연일 뿐 다른 의미가 없다. 살아가며 마주하는 역경이 인간을 단련시키는 효과 있다는 것을 인지적으로 의식할 수는 있지만 위로가 없다. 그냥 “재수가 없었다” 정도로 해석하고 털어낼
수 있으면 다행이다. 정말 절망적인 상황을 마주하면 어떤 비유와 같이 “ 물에 빠진 나를 내가 구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 되기도 한다.
내가 모든 걸 책임지고 내가 책임지지 못하는 건 보험으로 보장하는 게 고작이다. 하지만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 가장 가치 있다고 보는 것들이 다 무너질 때, 초월의 근거가 없는 이들은 함께 무너지기 쉽다. 기업파산, 경제적 빈곤, 연인의 배신, 아이의 학업적 실패, 불의의 사고로 건강을 잃는 등 여러가지 상황이 희망을 되찾기 려운 절망을 느끼게 하기도 하고 그 중 일부는 삶을 계속해갈 힘을 잃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왜 앞서 다룬 연구결과가 나타나는지 이해가 된다.
맺는 말: 유토피아- 종교가 없는 사회 vs 다양한 종교가 존중 받는 사회
긴 글을 통해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종교에 대한 오해를 살펴봤다.
오프닝에 트럼프와 일론 머스크를 언급한 만큼 미 대선 결과가 나오기 전에 발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잠들고 결국 발행일이 지나가 버렸다.
난 트럼프가 당선될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주목하고 있던 여러 영역에서 미국사회의 문제의 이면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덕분에 소위 “레거시 미디어”, CNN이나 MSNBC가 다루지 않지만 미국의 절반은 거슬려 하고 있는 사회이슈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한 번 더 민주당이 되기 어려운 정황 들도 마찬가지이다. 당선결과가 나오기 전에 말했어야 재미있었을텐데 타이밍을 놓친 게 아쉽다.
그렇다고 딱히 트럼프가 당선될 때 일어날 시장의 지각변동을 고려해서 포트폴리오의 구성을 변경한다거나 하는 금융적 전략을 구사 하지도 않았다. 달러나 미국주식을 더 사지도않았다.
그럼 난 뭘 했나?
트럼프 지지자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다
2016년 미국 대선시, 난 트럼프를 지지하는 친구들을 반대쪽으로 회유해보려는 소통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 그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듯 했다.)그 친구 둘은 내가 미국에서 지낼 때 함께 살았던 쌍둥이 형제이다. (날 거두어준 호스트 패밀리였다)
앞서 말했듯 10월 말 처음으로 트럼프가 출연한 약 3시간 분량의 팟캐스트 영상을 다 본 후, 그에 대한 인상이 조금 달라졌다. 왠지 예전에 그 친구들이 왜 저 사람을 지지하는 지 이해되지 않았던 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사과의 편지를 써 페이스북에 올렸다.
그 후, 그 중 한 명이 마침 페이스북 메신저로 말을 걸어와 오랜 만에 긴 대화를 했다.
쌍둥이 형제중 형이다. 내가 팟캐스트나 독립언론을 통해 듣던 내용은 미국의 현실이었고 그 역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카말라 해리스 대신 트럼프의 당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쌍둥이 동생의 아내는 하드코어 “좌” 민주당이다. 텍사스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사가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형과 다른 정당을 지지한다고 아쉬워했다.
남편의 존재는 원래 그렇다.
아내가 좋아하는 걸 지지하게 된다.
그래야 가정의 화목을 수호하기 쉽다.
한편 대선결과가 나오는 날을 일본여행 출국일로 삼은 다른 미국친구도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렸다. 여러 포스팅으로 미루어보아 하드코어 ’레프트/좌’인 민주당 지지자이다.
Leaving the country.
Might not comeback.
R.
트럼프 당선을 염두에 두고 하는 푸념이다.
이번 대선에서 1%의 차이를 만든 것은 공화당과 민주당의 포용력 차이도 있을지 모른다.
양극화된 미국에서 민주당에서 나타난 현상은 흥미로웠다.
민주당의 가치관은 D.E.I로 요약되어 거론되어왔다.
Diversity, Equity, Inclusion의 약어다. 다양성, (결과적)평등, 포용/수용을 뜻한다.
하지만 내부에서 조금이라도 민주당의 어젠다에 의문을 갖으면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순혈주의’적 태도로 자신들의 확신에 의구심을 갖는 것도 이에 대해 토론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트랜스젠더 이데올로기 (트랜스젠더리즘)이나 낙태권에 대한 것도 과학적 근거로 토론하는 것을 거부했다. 과학계열의 연구자들이 생물학적 현실을 거부하는 이런 태도를 보고 일부 이탈했다. 십대청소년들이 온라인에서 트랜스젠더가 되는 것을 고려할 땐 소셜미디어에서 적극적인 옹호와 지지를 해주다가 ‘디트랜지션’,‘탈성전환‘을 하면 엄청난 비난을 당했다.
민주당의 다양성과 수용성에는 자신들의 가치관에 반하는 ‘종교인’은 배척되었다. 노력의 차이 대신 결과의 차이를 강조한 것도 기존 미국의 가치관과 어긋났다. 미국이 사회주의화 되어 간다는 우려는 이 두 가지 특징에서 설득력이 있었다. (모든 공산주의 국가는 기독교를 탄압했다.)
한편 공화당은 그런 의문을 갖고 질문하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고 알려졌다. 민주당이 왜 공화당으로 오냐며 배격하지 않고 환영한 것이다. 그런 태도는 일부 기독교 정신의 포용력에서 드러난 것이라는 분석을 읽었다. 기독교는 적 조차 사랑하라고 가르치니 정치적 차이가 있었던 것은 수용할 수 있는 차이였던 게 아닐까 싶다.
가르침은 그러하나 인간사회 속 정치계는 다르다. 정치가 아닌 종교정신으로 사회포용이 일어날 수 있길 희망한다.
어쩌면 한국의 국익에 반하고 반중정서를 선동하는 트럼프의 당선을 내심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어떤 이득도 없는데.
다만 미국의 트렌스젠더이데올로기가 순진한 아이들에게 미치고 있는 악영향이나 임신 중후기에도 손쉽게 낙테를 하는 것을 지지하는 정책이 무고한 생명에게 미치는 영향을 줄이는 게 좋을 거라는 시점에서였다.
물론 트럼프는 지금도 내 취향의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미친 트럼프의 등장이 반가울 정도로 미국은 더 미쳐가고 있었다. 트럼프는 이번 선거기간 동안 본인이 대통령일 때 전쟁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 지역에서의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지 주목하게 된다.
종교는 사라지지 않는다.
종교인의 숫자가 급감하고 있다는 인상도 국제적으로 보면 달라진다.
우선 무교가 전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4%에 불과하다.
2011년부터 지금까지 기독교인의 감소수치는 31.7%에서 2014년 0.1% 감소한 것에 불과하다.
인간의 이성이 사회를 지배하면 사라질 미신으로 취급해왔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오히려 퍼져가고 있다. 미국의 경우, 기독교 신앙을 배척하는 민주장을 지지하는 진보주의파 10-20대 사이에서는 마법, 흑마법, 점성술에서 유행하는 트렌드가 주목되기도 했다. 주로 ‘spiritual but not religious’, ’영적인 것에 흥미는 있으나 종교는 없는‘ Gen Z 들 틱톡에서 보이는 추세이다.
인간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런 영역을 탐구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다.
어떤 이들은 그걸 진화론적 요인에서 찾고 어떤 이들은 그게 신이 인간이 신을 찾도록 만들어놓은 ’신 만이 채울 수 있는 빈자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종교가 사라질 일은 없다.
절대로.
아마 앞으로도 여러나라에서 “진보주의”라는 이름의 무신론/다신론적 가치관에 저항하는 보수적 세력이 되어 사회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건 성인이나 아이들의 정신건강, 정치에도 투자에도, 교육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독자님이 얻어갈 수 있는 건 관점의 확장이다.
그게 이 글의 선물이다.
그 관점이 독자님이 앞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놓치고 있던 것들을 채워줄 수 있으면 좋겠다. 비단 투자 전망 뿐만 아니라 인생의 다른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해 고민할 때도 말이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