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는 말
제 블로그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절기(크리스마스, 부활절)이 되면 조회수가 늘어나는 게시물들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예수신화설에 대한 조사내용입니다. [링크]
유입경로를 보니 예수의 이야기가 여러 신화들의 짜집기라는 주장이 인터넷커뮤니티에 올라오면, 이런 저런 검색을 해보시고 제 글을 읽어보신 분들께서 제 조사결과를 댓글로 남겨주시기도 한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한 저자나 단체가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연구하고 긴 시간에 걸쳐 집필한 책 한 권]보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한 장의 밈, 30초 짜리 숏츠의 영상이 더 영향력을 갖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전 소위 ‘진실’/truth 를 찾고자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단서들을 남기고 싶어 이번 포스팅을 쓰게 되었습니다.
※ 위 이미지에 사용된 책과 그 저자
Michael R. Licona - The Resurrection of Jesus: A New Historiographical Apporach
Richard Bauckham - Jesus and the Eyewitness: The Gospel as Eyewitness Testimony
William Lane Craig - The Son Rises: Historical Evidence for the Resurrection of Jesus
Gary R. Habermas - The Case for the Resurrection of Jesus
, Evidence for the historical Jesus: Is the Jesus of History the Christ of Faith
Craig A. Evans - Jesus and His World, (+The Archaeological Evidence, Jesus and His Contemporaries: comparative studies)
Daniel P Fuller - Easter Faith and history
N.T Wright - The Resurrection of the Son of God,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요즘은 '그래서 뭐가 사실인데? 뭐가 팩트? 진실이 뭘까?' 라는 순수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보다 성급한 결론을 전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많겠죠.
"어차피 ..." 로 시작되는 그 생각.
"어차피 알 수 없어."
"어차피 증명할 수 없는 거니깐 믿으면 돼."
"어차피..."
어쩌면 이 '어차피'가 진실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중도포기에 대한 마음의 불편함을 일시적으로 해소시켜주는 이 '추구지연'.
'먹고 살기 바쁘고 재밌는 것도 많은데 굳이 그걸 고민해야 하나 ? '
약 2,000여년 전 발생한 과거 사건에 대해 간단히 "사실이다.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 어떤 근거와 어떤 사유思惟를 거쳐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어려운 문제를 마주 하며 ”스압“(스크롤 압박)을 기대하지 않으신 건 아니시겠죠?
1. 전제의 전제
예수의 십자가형과 부활에 대해 '사실일리가 없다' 고 주장하는 사람은 어떤 걸 이유로 들고 있는지, 그게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어떤 이유를 들고 있는 지 오랜 기간 살펴봤습니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이 주제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토론영상을 보는 거였죠. (각 토론에서 토론자들이 제시하는 증거/근거들을 세밀하게 나누는 글도 언젠가 쓰게 되겠지만, 이번엔 개괄적으로 훑고 지나가보려 합니다.)
5년 이상 마주한 수많은 토론과 강의를 통해 발견한 게 있습니다.
결국 모두가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거죠. 또 그 전제 뒤에는 숨은 전제가 있는 경우도 많구요.
"과학적으로 입증 불가능한 것들은 사실이 아니다" 라는 철학적 전제.
이건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주의적 전제이죠.
"신에 관한 모든 것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는 거지, 이성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는 신앙적 전제.
이건 어쩌면 반지성주의적 전제이죠.
신의 존재 가능성 (혹은 부재의 가능성)을 전제적으로 배제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리 모두 그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세계관 속에서 자기합리화와 확증편향, 혹은 자기위로만 하게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리차드 도킨스,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대니얼 데닛, 리차드 캐리어 등.. 다른 전문성을 지닌 여러 학자들은 다 다른 어휘를 통해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A(or b,c,d,...)가 있기 때문에 GOD은 필요없다.
(Because we have A(or b,c,d,...), we don't need to bring God in the discussion
여러 버전이 있죠.
- 진화론이 있기 때문에 신이 필요하지 않다.
- 기적이 발생할 확률은 극도로 낮기 때문에 통계학적으로 발생확률이 더 높은 자연주의적 해석이 더 합리적인 해석이다.
- 과거에 발생한 일에 대한 기록의 신뢰도는 검증할 수 없다. 여러 사본의 불일치, 다른 저자들의 기록이 상충될 경우, 진짜 내용을 알 수 없다.
- 인간들의 생존을 위해 선을 도모하는 것이 인류의 생존에 유익하기 때문에 인류는 그렇게 진화했다. 절대적 선을 주장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신이 필요하지는 않다
- 과학이 있기 때문에 신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떤가요?
우선 無에서 생명이 시작되는 과정은 입증된 바 없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소진화(小进化/microevolution)이든 대진화(macro evolution)을 사용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방법과 환경에서 개입하여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죠. "절대적 선"을 주장하지 않더라도, "정보의 시작, 지성의 시작"을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건 '정보/지성'이죠.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어떤 반론도 무의미한 투정에 불가합니다.
- 신이 존재한다면 왜 악이 존재하냐 -
- 신이 존재한다면 왜 나한테 이렇게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거냐 -
- 신이 존재한다면 왜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약육강식을 통해 진화라는 매커니즘을 통해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인류가 시작되었냐
- 신이 존재한다면 왜 이리 많은 종교가 존재하냐
- 신이 존재한다면 왜 신을 욕하는 사람들을 그냥 두냐
- 신이 존재한다면 왜 신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나쁜 일을 하는 걸 허락하냐
어떤 존재의 증명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그 대상의 존재여부를 전제하는 게 옳을까요?
그건 순환논리이죠.
"신은 없다. " 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 "신이 없기 때문이다" , "신이 있을리가 없기 때문이다." 라는 주장을 하는 건 우스운 일이죠.
"신이 존재한다면, 왜 ㅇㅇㅇㅇㅇ ?"
라는 질문에도 전제가 숨어 있죠:
"신에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합리적인 이유는 있을 수 없다"
(≒ 내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리가 없다
≒ 내가 이해가 안되면 그건 불합리한 이유이다 )
라는 생각이죠.
(예: '신이 존재한다면 왜 고통이 있고, 죽음이 있냐', '신이 존재한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냐' 등등)
제가 보고 들은 수백시간의 토론영상들은 모두 위의 내용으로 요약가능합니다.
2. 역사적 사건을 마주하는 현실적 태도
전 예수신화설에 대한 조사를 통해서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존재한다- "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 비교검증 프로젝트를 통해서 할 수 있었던 건, 예수의 이야기가 온라인에 떠도는 허위정보처럼 그 유사성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죠.
그럼 예수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는 방법엔 어떤 게 있을까요?
"과학적으로" 예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우선 걷어내야할 오해는 '과학적'이란 단어의 의미인 것 같습니다.
과거에 발생한 모든 사건을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검증할 수 있을까요?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친 어떤 종류의 자연재해 같은 경우, 지질학적 탐사를 통해 발생유무를 추측해볼 수 있겠지만, 인류사의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의 경우, 비슷한 방법을 사용할 수 없겠죠.
재현불가한 과거를 다루는 범죄수사시 "증거"를 찾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적 수단이 동원되지만, 물리적 증거와 사람의 증언, 그리고 정황을 고려하여 사람의 판단을 통해 유죄여부를 결정합니다.
오래된 과거 사건에 대한 해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로는 "역사기록"이 있습니다.
사람이 문자를 사용하여 종이나 돌 등 어떤 매개체에 적은 내용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기록을 바라볼 때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될 수 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의 법정에서와 같이 한 사람의 범죄행위가 입증되기 전까지 '무죄 추정(innocent until proven guilty'을 할 지, 아니면 무죄가 입증될 때까지 '유죄 추정(guilty until proven innocent)을 할 지....
역사적 사료에 대해서도 비슷합니다.
"다른 해석이 기존의 해석을 대체할 수 있기 전까지는 기록의 대부분을 사실로 받아들일지"
vs.
"입증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을 의심할 지"
이 두 가지 입장 차이에서 발생하는 해석의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겠죠.
ㅇㅇ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전에 이 부분에 대한 인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해체주의나 회의주의적 시선으로 과거의 기록을 바라볼 때, "과거에 일어난 일을 정확히 아는 건 어차피 불가능하다" 라는 해석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어차피'는 진실에 가까워지는 탐구라기보단 주관적 결론에 정착하기 위한 '지적 게으름intellectual laziness'일 가능성이 높을 수 있죠.
이순신 장군의 예
그 시선을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에 적용한다고 해봅시다.
이순신 장군의 DNA 기록이나 한산도 대첩을 카메라로 풀영상으로 촬영한 자료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의 기록을 신뢰하고 살아가고 있죠.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홍재전서, 서애집, 약포집, 백사집, 난중답록, 재조번방지 등)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한산도, 명량, 노량해전)의 기록에 대해 조금의 과장이라도 없는 게 확실한지? 이게 혹시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집단이 반일감정 혹은 애국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해 역사기록을 조작해서 전국민을 대상으로 신격화 시키고, 세뇌를 한건지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요?
그런 기록을 바라볼 때, 그 기록을 의심해야 할 필요는 언제 생길까요?
이런 '음모론적' 해석은 언제 어떤 것을 근거로 적용시켜야 합리적 의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록을 비롯하여 이를 해석할 수 있는 여러 가설과 현재 갖춰진 정보들을 사용해야 알 수 있겠죠.
3. 성경 밖의 예수에 대한 기록
이 주제에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예수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만 적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존여부는 의문의 대상이 아니었죠.
초기기독교인들의 기록을 제외하고도 제가 찾은 예수에 대한 기록한 문서를 나열하면 10개 정도 됩니다.
예수가 처형당한 후 몇 백년 후에 기록된 게 아니라 같은 세기 혹은 그 다음 세기 안의 기록이죠.
이 기록 시점이 사건 발생 시기와 가까울수록 사실 외의 것들이 추가될 가능성이 낮다고 보기 때문에 이 기록 시점이 의미가 있습니다.
(영국의 전설 속의 아더왕/아서왕에 대한 기록은 그가 활동했다고 전해지는 시기보다 300-400년 후에야 처음 나타납니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는 BC 2333년 경의 일을 1281년 후의 승려가 기록했고 조로아스터교의 자라투스트라는 BC 1400-1000여년 경의 인물을 AD 300년 경이 되서야 문자로 기록 되었고 BC 600년대의 싯다르타 고마타 “붓다”도 AD 1세기가 되어야 기록 됩니다.)
복음서와 바울서신을 제외한 역사 속 인물들(철학자, 역사가, 정치인 등이 기록들 간단하게(?) 요약해서 나열해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탈루스 Thallus (or Thallos) (52 A.D) - 역사가: "예수가 살았고, 십자가형을 당했고, 어둠과 지진이 있었다"
*Julius Africanus의 글 Chronography 18:1에 인용됨" - 타키투스 Tacitus (56-120 A.D) - 로마 제국의 정치가, 역사가: "예수가 '그리스도'로 불렸고, 크리스천들이라는 추종자들이 있었고, '빌라도'에게 처형당했다"
- 마라 바르 세라피온 Mara Bar-Serapion (70 A.D) -시리아 철학자 : (아들에게 쓰는 편지내용)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비교하며)지혜로운 왕으로 불렸고,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했고, 그의 가르침이 남아있다"
- 트랄레스의 펠곤 Phelgon (of Tralles)(80-140 A.D) -역사가: "티베리우스 (율리어스 카이사르 Tiberius Caesar) 시절에 보름달에, 일식이 있었다" (Julius Africanus에게 인용됨), (펠곤의 13-14번째 책 중 ) (예수가) 미래를 예측했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 지진이 있었다, 죽었다가 다시 출현했다" (오리겐에 인용됨 - Origen Against Celsus)
- 소 플리니우스 Pliny the Younger (61-113 A.D) - 로마 황제에게 쓰는 편지에 초대 기독교인들의 삶에 대해 묘사함: "해가 밝기 전에 모여 '그리스도'를 신처럼 모시며 찬양하고, 악행을 하지 않고, 사기치지 않고, 도둑질, 음행, 위증 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고 정상적인 음식을 나눠먹고 헤어졌다."
- 수에토니우스 Suetonius (69-140 A.D) - 고대 로마의 작가, 전통문화 연구가 : 황제 하드리안 아래 연대기 기록 중 : "로마의 유대인들이 크레스투스(그리스도의 오타)의 선동 때문에 계속 문제를 일으켜서 로마에서 쫓아냄") * Life of Claudius 25:4)
- 루키아노스 Lucian of Samosata (115-200 A.D) - 그리스 작가, '그리스도'와 '크리스천'을 풍자함. "크리스천들이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숭배... 인간이 죽지 않는다고 믿고 있고... 죽음을 경시하고 자발적 섬김....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형제라고 믿음..십자가에 죽은 현자를 숭배...세상의 좋은 것들(부귀영화)를 경시하고 공동자산처럼 취급함" (The Death of Peregrine. 11-13)
- 켈수스 Celsus (175 A.D) - 초기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학파) :예수에게 목자 아버지가 있고, '마법'이 있었고, 신이었다는 주장에 대한 기록을 남김: "예수는 유대지역의 가난한 유대인 여자로 부터 태어났고.. 간음으로 처벌 받아 목수 남편으로 부터 쫓겨나고 예수라는 사생아를 낳음. 가난해서 이집트로 감. 이집트에서 이집트 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마법 (magical power)를 얻어 돌아옴... "
*초자연적인 탄생을 받아드릴 수 없어 당시 예수를 반대하던 유대인들의 주장을 인용함 - 요세푸스 Josephus (37-101 A.D) - 유대인 역사가. <유대고대사>에 "예수가 이적을 행하고, 유대인들과 그리스인의마음을 얻고, 빌라도가 십자가형을 내렸지만. 그 이후에도 '크리스천'이라고 불리는 그를 사랑한 이들(제자/추종자)은 지금까지(기록시점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부활했다는 주장"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 *두 개의 기록 중 하나는 기록이 조작되었다고 주장된 것으로 의심 받음.
예수가 이 땅을 밟았던 시대가 수세기 지난 후에 기독교인들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유대인들의 기록에도 등장합니다.
*성서/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을 참고하면 유대교 종교지도자들 눈에 예수는 신성모독자이자 자신들의 종교 사업을 방해하는 눈엣가시였죠. 회중들을 선동하여 체포된 예수 대신 혁명가(로마입장에선 반역자)를 풀어달라고 한다거나, 예수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말하라고 사주하는 장면도 묘사되었죠.
(*실제로 예수의 제자들이 그 시신을 가져갔다면 그들은 예수가 신이 아니었던 걸 알고, 부활이란 기적도 믿지 않은 상태에서 기독교라는 신흥종교에 대한 핍박을 받으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짓말을 전했어야 된다는 모순이 생기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설득력이 낮다고 생각됩니다)
반기독교적인 유대인들의 기록에서도 실존여부를 부정하지 않고, 유월절 전 날 처형당했다거나 마법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켰다는 등 예수의 행적에 대한 내용이 확인됩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 Jewish Talmud (400-700 A.D) - 5세기 유대인 랍비들의 탈무드 글에 예수에 대해 언급. (예수라는 단어 대신 '암호'처럼 'Balaam' 'Ben Stada', 등의 단어로 사용된 것도 있으나, 직접적인 언급만 나열하면):
"예수는 마법을 사용했고, 이스라엘을 미혹했다" (Sanhedrin 43a)
(시편 91:10 "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를 해석할 때, 재앙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면서, 나사렛 예수처럼 음식을 불태우는 아들이 없을 것이다 " 라는 설명을 함"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겐 예수는 신성모독자이니 적대적이죠)
"유월절 전 날 예수를 매달았다. 40일 전부터 그가 마법을 써서 이스라엘을 미혹시켰기 때문에 돌에 쳐맞아 죽을 거라는 예고 하고, 그에게 유리한 것을 아는 사람은 나오라 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기에, 유월절 전날에 예수를 매달았다." (Sanhedrin 43.a)
톨레돗 예슈 Toledot Yeshu (1000 A.D) - 예수의 생애가 약 1,000년 정도 후, 중세시대 유대인들은 예호슈아(예수)의 출생에 대해 야사(野史)적이고 판타지요소가 있는 묘사를 남김. 하지만 목수의 아들이라든가 이적을 행했다거나 하는 내용은 복음서에서 말하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다만 그런 이적을 행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성전에 새겨진 신의 비밀스런 이름“을 알게 되어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죠.
(요약번역) 유다지파의 요셉 판데라(Joseph Pandera)라는 이웃남자가 약혼자인척 미리암'(마리아의 히브리 어 이름)을 속여서 그녀를 임신시키는 비극이 이스라엘에 일어났다" 라고 설명함. 예호슈아라는 이름이 나중에 "예슈"가 됐다는 것.
8일 후 할례 받았고, 랍비들이 율법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교만한 해석을 하는 불경스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함. 모세가 제쓰로(장인어른)에게 지도를 받았으면 가장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없다-라는 의견을 냈고…그래서 추궁당하고 ...출생의 "비밀"이 알려지고 갈릴리로 도망 갈 수 밖에 없었다..
성전의 초석 새겨진 '신의 이름 (말할 수 없는)'이 있었는데 그 이름의 비밀을 알게 되면 뭐든지 원하는대로 할 수 있었다[마법의 힘]. 그래서 현자들은 그 지식이 알려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다...동으로만 사자들이 번제물을 올리는 곳의 기둥에 있었고, 그 이름을 배운 사람이 (그 곳을 떠난 때, 사자들이 포효하여 그 귀중한 비밀이 잊혀지게 했다. 그(예수)는 그 '(신의) 이름'을 양피지 종이에 적어서 허벅지를 (칼로) 절개해서 .. 살로 그 '종이'를 덮어서, 가지고 나왔다. 나올 때 사자들이 포효하여 그는 그 비밀을 잊었다. 하지만 그가 집으로 돌아와서 (허벅지의) 상처를 다시 열고 적은 내용을 보고 다시 기억을 되찾고, 그 이름의 사용법을 기억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310명의 젊은이들을 모아 자신의 출생에 대해 험담하고 다닌 이들을 정죄하고, "나는 메시아이다. 나에 대해 이사야가 예언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그는 다른 메시아닉 텍스트를 인용했다. (생략) 반란자들이 만약 예수가 메시아면 계시(기적)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고, 사람들이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이를 데려왔다. 예수가 '형언할 수 없는 이름'을 말하니, 나환자가 나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라고 숭배했다.... (생략)
* 너무 흥미진진한 소설 같네요... 이건 전문을 나중에...다시..
(원문 접음처리-생략)
“In the year 3671 (in Jewish reckonging, it being ca 90 B.C.) in the days of King Jannaeus, a great misfortune befell Israel, when there arose a certain disreputable man of the tribe of Judah, whose name was Joseph Pandera. He lived at Bethlehem, in Judah. Near his house dwelt a widow and her lovely and chaste daughter named Miriam. Miriam was betrothed to Yohanan, of the royal house of David, a man learned in the Torah and God-fearing. At the close of a certain Sabbath, Joseph Pandera, attractive and like a warrior in appearance, having gazed lustfully upon Miriam, knocked upon the door of her room and betrayed her by pretending that he was her betrothed husband, Yohanan. Even so, she was amazed at this improper conduct and submitted only against her will. Thereafter, when Yohanan came to her, Miriam expressed astonishment at behavior so foreign to his character. It was thus that they both came to know the crime of Joseph Pandera and the terrible mistake on the part of Miriam… Miriam gave birth to a son and named him Yehoshua, after her brother. This name later deteriorated to Yeshu (“Yeshu” is the Jewish “name” for Jesus. It means “May His Name Be Blotted Out”). On the eighth day he was circumcised. When he was old enough the lad was taken by Miriam to the house of study to be instructed in the Jewish tradition. One day Yeshu walked in front of the Sages with his head uncovered, showing shameful disrespect. At this, the discussion arose as to whether this behavior did not truly indicate that Yeshu was an illegitimate child and the son of a niddah. Moreover, the story tells that while the rabbis were discussing the Tractate Nezikin, he gave his own impudent interpretation of the law and in an ensuing debate he held that Moses could not be the greatest of the prophets if he had to receive counsel from Jethro. This led to further inquiry as to the antecedents of Yeshu, and it was discovered through Rabban Shimeon ben Shetah that he was the illegitimate son of Joseph Pandera. Miriam admitted it. After this became known, it was necessary for Yeshu to flee to Upper Galilee. After King Jannaeus, his wife Helene ruled over all Israel. In the Temple was to be found the Foundation Stone on which were engraven the letters of God’s Ineffable Name. Whoever learned the secret of the Name and its use would be able to do whatever he wished. Therefore, the Sages took measures so that no one should gain this knowledge. Lions of brass were bound to two iron pillars at the gate of the place of burnt offerings. Should anyone enter and learn the Name, when he left the lions would roar at him and immediately the valuable secret would be forgotten. Yeshu came and learned the letters of the Name; he wrote them upon the parchment which he placed in an open cut on his thigh and then drew the flesh over the parchment. As he left, the lions roared and he forgot the secret. But when he came to his house he reopened the cut in his flesh with a knife an lifted out the writing. Then he remembered and obtained the use of the letters. He gathered about himself three hundred and ten young men of Israel and accused those who spoke ill of his birth of being people who desired greatness and power for themselves. Yeshu proclaimed, “I am the Messiah; and concerning me Isaiah prophesied and said, ‘Behold, a virgin shall conceive, and bear a son, and shall call his name Immanuel.’” He quoted other messianic texts, insisting, “David my ancestor prophesied concerning me: ‘The Lord said to me, thou art my son, this day have I begotten thee.’” The insurgents with him replied that if Yeshu was the Messiah he should give them a convincing sign. They therefore, brought to him a lame man, who had never walked. Yeshu spoke over the man the letters of the Ineffable Name, and the leper was healed. Thereupon, they worshipped him as the Messiah, Son of the Highest. When word of these happenings came to Jerusalem, the Sanhedrin decided to bring about the capture of Yeshu. They sent messengers, Annanui and Ahaziah, who, pretending to be his disciples, said that they brought him an invitation from the leaders of Jerusalem to visit them. Yeshu consented on condition the members of the Sanhedrin receive him as a lord. He started out toward Jerusalem and, arriving at Knob, acquired an ass on which he rode into Jerusalem, as a fulfillment of the prophecy of Zechariah. The Sages bound him and led him before Queen Helene, with the accusation: “This man is a sorcerer and entices everyone.” Yeshu replied, “The prophets long ago prophesied my coming: ‘And there shall come forth a rod out of the stem of Jesse,’ and I am he; but as for them, Scripture says ‘Blessed is the man that walketh not in the counsel of the ungodly.’” Queen Helene asked the Sages: “What he says, is it in your Torah?” They replied: “It is in our Torah, but it is not applicable to him, for it is in Scripture: ‘And that prophet which shall presume to speak a word in my name, which I have not commanded him to speak or that shall speak in the name of other gods, even that prophet shall die.’ He has not fulfilled the signs and conditions of the Messiah.” Yeshu spoke up: “Madam, I am the Messiah and I revive the dead.” A dead body was brought in; he pronounced the letters of the Ineffable Name and the corpse came to life. The Queen was greatly moved and said: “This is a true sign.” She reprimanded the Sages and sent them humiliated from her presence. Yeshu’s dissident followers increased and there was controversy in Israel. Yeshu went to Upper Galilee. the Sages came before the Queen, complaining that Yeshu practiced sorcery and was leading everyone astray. Therefore she sent Annanui and Ahaziah to fetch him. The found him in Upper Galilee, proclaiming himself the Son of God. When they tried to take him there was a struggle, but Yeshu said to the men of Upper Galilee: “Wage no battle.” He would prove himself by the power which came to him from his Father in heaven. He spoke the Ineffable Name over the birds of clay and they flew into the air. He spoke the same letters over a millstone that had been placed upon the waters. He sat in it and it floated like a boat. When they saw this the people marveled. At the behest of Yeshu, the emissaries departed and reported these wonders to the Queen. She trembled with astonishment. Then the Sages selected a man named Judah Iskarioto and brought him to the Sanctuary where he learned the letters of the Ineffable Name as Yeshu had done. When Yeshu was summoned before the queen, this time there were present also the Sages and Judah Iskarioto. Yeshu said: “It is spoken of me, ‘I will ascend into heaven.’” He lifted his arms like the wings of an eagle and he flew between heaven and earth, to the amazement of everyone…Yeshu was seized. His head was covered with a garment and he was smitten with pomegranate staves; but he could do nothing, for he no longer had the Ineffable Name. Yeshu was taken prisoner to the synagogue of Tiberias, and they bound him to a pillar. To allay his thirst they gave him vinegar to drink. On his head they set a crown of thorns. There was strife and wrangling between the elders and the unrestrained followers of Yeshu, as a result of which the followers escaped with Yeshu to the region of Antioch; there Yeshu remained until the eve of the Passover. Yeshu then resolved to go the Temple to acquire again the secret of the Name. That year the Passover came on a Sabbath day. On the eve of the Passover, Yeshu, accompanied by his disciples, came to Jerusalem riding upon an ass. Many bowed down before him. He entered the Temple with his three hundred and ten followers. One of them, Judah Iskarioto apprised the Sages that Yeshu was to be found in the Temple, that the disciples had taken a vow by the Ten Commandments not to reveal his identity but that he would point him out by bowing to him. So it was done and Yeshu was seized. Asked his name, he replied to the question by several times giving the names Mattai, Nakki, Buni, Netzer, each time with a verse quoted by him and a counter-verse by the Sages. Yeshu was put to death on the sixth hour on the eve of the Passover and of the Sabbath. When they tried to hang him on a tree it broke, for when he had possessed the power he had pronounced by the Ineffable Name that no tree should hold him. He had failed to pronounce the prohibition over the carob-stalk, for it was a plant more than a tree, and on it he was hanged until the hour for afternoon prayer, for it is written in Scripture, “His body shall not remain all night upon the tree.” They buried him outside the city.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his bold followers came to Queen Helene with the report that he who was slain was truly the Messiah and that he was not in his grave; he had ascended to heaven as he prophesied. Diligent search was made and he was not found in the grave where he had been buried. A gardener had taken him from the grave and had brought him into his garden and buried him in the sand over which the waters flowed into the garden. Queen Helene demanded, on threat of a severe penalty, that the body of Yeshu be shown to her within a period of three days. There was a great distress. When the keeper of the garden saw Rabbi Tanhuma walking in the field and lamenting over the ultimatum of the Queen, the gardener related what he had done, in order that Yeshu’s followers should not steal the body and then claim that he had ascended into heaven. The Sages removed the body, tied it to the tail of a horse and transported it to the Queen, with the words, “This is Yeshu who is said to have ascended to heaven.” Realizing that Yeshu was a false prophet who enticed the people and led them astray, she mocked the followers but praised the Sages.
-The Toledot Yeshu -
*소위 “위경(伪经)pseudepigrapha”로 불리는 문서들도 위 <톨레돗 예수>와 비슷한 문학장르가 됩니다. 예수 사후 200-300년 후에 쓰여지며 신화적 요소가 가미된 걸로 해석합니다.
(복음서에 대한 기록시기도 의견이 갈리는 부분이 있지만 묘사된 사건들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같은 역사적으로 기록된 사건과 대조해보고 시기를 추정) 학자들이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보는 마가복음(마라코의 복음서)은 빠르면 30-60년 사이에 기록됐다고 보고 (혹은 A.D 65~100)년 사도바울의 서신들은 18-35년 사이에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베드로 복음서(Gospel of Peter)"라든가 "도마 복음서(Gospel of Thomas)"등은 성경에 정경(cannon)에 포함되지 않은 문서들을 보면 반기독교적은 아니지만 목격자의 기록으로 보기 어려운 신격화적 묘사가 많기 때문에 허위성에 대한 의심이 높기에 제외 되었다고 합니다. (숨겨진 비밀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실존성, 역사성을 부정하려면 동시대 다른 사료史料들을 부정해야 된다는 부담이 생기겠죠. (톨레돗 예슈는 사료로 분류하기 어렵겠지만요..) 심지어 한 시대에선 기독교와 대립한 이슬람 경전에도 예수에 대해 기록하니깐요.
그래서 역사학자들의 대부분이 예수가 실존인물이었다는 걸 부정하기 어려운 겁니다. 종교적 믿음 여부와 상관없이요. 예수의 실존을 부정하는 극단적 회의주의자들의 주장을 학계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거죠.
다만 각 학자들이 가진 세계관 속에서 초월적 존재, 혹은 “기적 발생가능성”에 대해 다른 입장이 있기 때문에 “부활 사건”과 같은 기적에 대한 기록을 해석할 때 입장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겠죠.
예수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때, 역사학자들의 연구방법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스로를 회의주의자라고 정의하지 않는 한, 역사학자들은 대부분의 기록을 바라볼 때 법정의 무죄추정 원칙과 같이 '사실 추정 원칙'을 가지고 당시 역사적 정황을 고려하여 사안을 파악한다고 합니다.
4. 피해야 하는 사고법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아니, 13척이던가....?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첩 중 하나 명량대첩에서 격침시킨 적군 함정의 수가 한국의 기록과 일본의 기록 간의 근소한 차이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고 가정해봅시다.
(실제 사례로는 교과서 및 백과사전에 이순신 장군에게 남아있던 배의 수가 12척으로 기록된 것과 13척으로 기록된 것이 있어차이가 있습니다 - 기사링크
한편 13척으로 300척을 이겼다는 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없는 민간 설화이고 실제로는 13척의 판옥선과 32척의 초탐선으로 4분의 1인 31척을 격침 - 링크)
만약 그런 차이가 존재한다고 해서 거북선은 상상의 발명품이고 이순신 역시 애국주의적 목적을 가지고 창조해낸 상상의 인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그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관련된 모든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 그건 합리적인 판단일까요?
다른 분야의 예를 빌리자면, 허준의 동의보감 같은 책의 의학적으로 유용한 정보가 있지만 “은형법隐形法“,투명인간이 되는 법이나 원앙을 먹으면 부부 금슬이 좋아진다거나 하는 내용도 있기 때문에 선별적으로 취사합니다. 하지만 현대의학의 기준을 봤을 때 황당한 내용이 있다고 해서 '허준'이라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할 수 없겠죠.
하지만 네 명의 인물이 당대 사람들의 목격담을 바탕으로 작성한 예수에 대한 연대기는 어떤가요?
그게 지금은 성경이라는 종교경전으로 분류되어 역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라기보단 신앙적 가치에만 도움이 될 것 같은 복음서로 불리고 있지만 예수에 대한 가장 세세한 기록이 담겨있죠. 이 네 개의 복음서에 어떤 디테일 상의 차이가 있다고 모든 걸 허구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합리적일까요? 과거에 여기에 대해 가볍게 훑어본 적이 있습니다. (링크)
침몰한 타이타닉호의 생존자들의 증언에도 배가 통째로 가라앉았다, 두동강이가 나서 가라앉았다 증언의 차이가 있다고 하죠.
종교적 문서에 무조건 역사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면 아마 부처 싯다르타 고타마, a.k.a 석가모니의 실존여부가 논란이 될 수 있겠네요.
유독 예수라는 인물에 관련해서는 사람들이 다른 입장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인터넷/온라인 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위의 두 가지 예와 비슷한 논리로 신화 속 인물이라는 주장을 합니다.
증거의 부재 ≠ 부재의 증거
한편 또 동시대 모든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기록을 하진 않았죠.
1세기와 21세기 정보화시대의 차이가 있었을테니 '그렇게 위대한 사람이 있었더라면 각국의 역사가들이 기록했었어야 한다'라는 가설/전제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런 전제는 헤롯왕의 영아살해 명령에 대한 반문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조사결과는 다음 게시물에서 확인가능합니다. 링크)
현대문명 중심적 사고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더라면 역사가들이 기록했어야 한다" 라는 전제 안에는 그런 일들을 "끔찍하게 여겼다는 전제"와 "역사가들에게 알고 있었어야 한다"는 전제, 그리고 "역사가들이 그런 사건을 기록했었을 것이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대의 기록을 보면 성별이 맘에 안들거나, 장애가 있어보이거나, 불륜을 통해 생겼거나...... 여러 상황에서 영아들은 유기되어 생명을 잃었고, 불법으로 규정되지 않은 위험한 낙태가 성행했다는 기록도 있고, 심지어 어떤 종교의식에서 신에게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 참고자료:
- 자료1 (JStor - Turtullian on Child Sacrifice),
- 자료2 (NIH National Library of Medicine - The Romans and ritual murder),
- 자료3 (University of Oxford -News 'Ancient Carthaginians really did sacrifice their children)
21세기의 문명인, 현대인들의 도덕적 기준, 문화감수성의 기준으로 역사를 바라볼 때 생기는 갭/차이가 존재하는 거죠.
또 다른 단서: 문화의 변천사
그럼 그 도덕적 기준, 사회 단위의 이 기준의 시작은 어디서였을까요?
예를 들어 인류역사 속에서 남녀평등의 개념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중국/유교문화권에서 시작되지 않았죠.
인도/힌두교 문화권, 불교 문화권에서 시작되지도 않았죠.
중동/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현재까지도 남녀평등의 개념이 확립되었다고 말하기 어렵죠.
이 질문도 진실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는 의미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필이면 왜? 기독교 유럽에서 시작되었나?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영역은 과학입니다. 과학사를 살펴보면 이론과학의 발전, 과학의 혁명 역시 기독교 국가의 기독교인 과학자들에 의해 시작됩니다.
모든 해석에는 반대 입장의 해석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론이 불가능한 것만이 확실한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고 보는 게 현실적이죠.
5. 기독교: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보다 뭘 했는지가 관건인 “종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중 역사적 인물을 바탕으로 시작된 종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불교이죠. 힌두교는 전승되어 온 세계관이자 철학으로서 존재하지만 특정인물이 창시자라고 주장하지 않죠.
유대교의 경우, 모세, 다윗 왕, 솔로몬 왕 등 역사적으로 실존했다고 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탄생을 이집트 노예시절부터 주변 강대국 바벨론(바빌로니아), 앗수르(앗시리아)에 점령되어 포로 생활을 하는 여러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유대교 경전인 '타나크/타낙' (기독교의 구약 성경/성서)에 그런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해서 전해졌구요. (신이 뭘 했다- 뭐라고 했다 부터 10개의 재앙, 홍해의 기적 등 초자연적인 이야기를 배제하더라도 지명, 위치, 당시 타국의 왕의 이름 등 여러가지 역사학적으로 유의미한 정보를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모세가 실존하지 않았다. 다윗왕도 솔로몬 왕도 그저 허구의 인물이라면 그저 종교적 세계관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고대근동의 역사가 달라집니다.
이슬람 역시, 모하메드라는 인물이 실존 인물이 아니라면 여러가지 설명하기 어려운 게 생기겠죠. 그가 천사의 계시를 받아 기록했다는 내용이 쿠란이라는데 그걸 받은 사람이 없어지니깐요.
(물론 쿠란의 사본학을 살펴보면, 이스람의 세번째 칼리파(이슬람의 최고 종교 지도자)인 오스만(Uthman) 시절 존재하던 쿠란을 수집하여, 한 종류의 원본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불태웠다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내용을 변경했다면 그걸 검증할 방법이 없었다고 알려져 있었죠. 그러다가 1972년에 예멘에서 제일 오래된 사본(AD7-8세기)이 발견되어서 기존의 제일 오래된 사본은 9세기 것으로 판명되었었구요. 그 사본들을 찍은 마이크로필름은 독일로 가져왔는데 관련된 연구가 저지되고 있는 정황이 있었네요. 관련 한국 기사: 링크 | 영문/독일어 기사 : 링크)
불교의 경우, 어떤가요? 왕가의 후손 석가모니(고타마 싯다르타)가 안락한 삶을 살던 중 몰래 궁궐 밖에 나가 마주한 인생사의 번뇌를 벗어나고자 수행을 거쳐 깨달음을 얻고 시작되었죠.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적어서 퍼져나갔다고 하죠. 제가 알던 바를 대충 요약하면 원시불교의 세계관은 무신론으로 설명해도 무방했지만, 두 분파로 갈려진 그의 제자들에 의해 퍼져나가던 중, 극락이라든가 하는 사후세계에 대한 세계관이 혼재되었다고 합니다.
※ 이걸 쓰다가 궁금해져서 알아보니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에 대한 기록이 모호하군요.
활동시기에 대한 의견이 편차도 꽤 있구요. (기원전 560-480년, 혹은 ~기원전 405년)
불교 경전의 내용에 띄엄띄엄 나오는 것 같아요.
당시 인도의 역사 기록엔 신화와 역사적 사실이 혼재되어 기재되던 시절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출생에 관한 이야기도 재밌네요.
"꿈 속에 하얀 코끼리가 마야(엄마) 오른편으로 들어갔고, 아이는 마야의 오른편(허리)에서 (이미 붓다는 갓난 아기가 아닌) 성장한 모습으로 생겨나서(emerged) 일곱 발자국 걸었다"
The child emerged from Maya’s right side fully formed and proceeded to take seven steps. "
(출처: Met Museum.org - 참고문서 링크)
*자궁외 임신+질식분만이 아닌 늑골 외측 분만..?…*
석가모니는 소위 '고통의 문제(Problem of Pain)'라고 불리는 주제를 해결하고자 모든 고민은 무의미하다라는 결론을 도출하신 것 같은데 ... 흠... 여기에 대해서는 제가 좀 더 공부해보고 의견을 내는 게 현명할 것 같아 그만 줄입니다.
아무튼 이상의 종교들의 소개된 인물들 중 아무도 자신을 신이라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붓다' 고타마 싯다르타 (석가모니)는 신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 같고, '연기법緣起法'이라는 세상의 사물의 인과관계에 집중한 사상(?)으로 세상을 해석했죠.
(멀리내다보면 이 사상이 이론 과학의 발전을 저해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예수는 어떤가요.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는 예수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기엔 유대교의 경전(구약성경/성서)의 연속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기원은 유대교의 기원과 일치시키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위에 소개된 고타마 싯다르타의 탄생과 간단히 비교해보면 별과 소위 '동방박사'의 이야기가 있지만, 정상적인 출생이 묘사됐을 뿐이죠. 역사적 배경을 가늠할 수 있는 헤로드(헤롯) 왕에 대한 이야기도 있구요.
고타마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그가 실존인물이 아니라 다른 누가 얘기했어도 불교에 미치는 영향이 없죠.
만약 무함마드/모하메드가 아닌 그 후의 칼리파가 '같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해도 이슬람이 달라질 건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다르죠. 예수가 실존인물이 아닐 경우,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현대 사회, 현대 도덕관으로는 너무 엄격하다거나 편협하다고 주장하는 부분도 있겠죠. 하지만 기독교의 핵심은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가와 예수가 뭘 했는가에서 시작합니다.
예수의 모든 가르침은 만약 그가 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의 아들' (=혹은 신)이 아니라면 그저 또 다른 한 사람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으니깐요.
6. 기독교의 허구성을 입증하고 싶다면……
그래서 기독교를 부정하고자하면 그 공격 대상은 역사적 사건의 발생여부, 예수의 실존여부에 촛점이 맞춰집니다. 그의 실존여부를 부정할 수 없던 중세시대 유대인들이 톨레돗을 통해 시도했던 방법은 출생의 비밀에 대한 해석, 기적을 행할 수 있던 이유에 대한 해석 등을 추가해서 그 인물에 대한 해석을 바꾸려는 거였구요.
자연과학적으로 예수가 부활할 수 있는 지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굳이 예수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대부분의 역사 속 인물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됩니다. 그건 실험을 통해 반복가능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죠.
데이비드 흄과 같이 ‘기적은 불가능하다’라는 철학적 주장도 깊이 생각해보면 무의미 합니다.
자연법칙을 위반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기적"의 정의 자체가 자연법칙을 초월하죠.
또 자연법칙을 만들고 운영하는 신이 존재한다면, 필요에 따라 그 기적을 만들어내지 못할까요?
비유를 만들어보죠.
영화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빌린 비유
어떤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이 세상이 시뮬레이션이고 영화 매트릭스와 같은 가상의 공간이라고 가정했을 때, 신은 그 설계자로 비유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 설계자가 자신을 그 매트릭스 안에 집어 넣어 개입하기로 결정했다고 가정해보죠.
하지만 설계자는 자신이 만든 세상에 너무 파괴적으로 등장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가장 작은 모습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매트릭스 안의 다른 인물들처럼 작은 수정란에서 시작해서 성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가상세계 속의 물리법칙/물리엔진을 설계한 그가 자신을 그 세상의 한 캐릭터/존재로 움직일 때, 자신에게는 그 물리법칙을 초월해서 예외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설정을 변경합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이 권한을 부여한 인물들에게만 유사한 예외적용을 부여합니다.
이 예외가 기적인거죠.
논리적으로 재미있는 것은
규칙적인 자연법칙이 없다면 사람들은 무엇이 기적인지 모를 거라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물 위를 걷고, 병자를 고치고, 죽었다가 살아나고, 하늘 위로 올라가고 하는 게 늘 발생하는 세상이라면, 무엇이 기적인지 알 수 없는 세상인거죠.
그래서 '기적은 불가능하다.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무신론적 세계관에서만 적용되는 제한된 논리가 되는 겁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건 무의미한 반론이 된다"는 게 이 말입니다.
7. 결론이 아닌 새로운 질문의 시작: the meaningful questions
그럼 결국 뭘 전제할 건지, 맹목적으로 믿어야 하는 걸까요? 눈먼 신앙이 시발점/시작점이 될 수 밖에 없는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여러 역사학자들이 역사과학적 조사방법을 통해 과거의 발생한 일과 현재 발생한 일의 상관관계를 보며 분석을 하고 이미 일어난 일들에 대해 가장 합리적인 해석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인과관계(Cause and effect)를 근거하여 발생한 일(effect)를 가지고 그 원인에 대한 가설을 세워보고 가장 설명력이 있는 가설을 채택하는거죠.
또 자료를 분석할 때는 발생시점으로부터 이른 기록과 직접 목격한 사람들의 기록에게 더 무게를 싣는 거죠.
3.에서 설명한 예수에 대한 기록은 그의 추종자들의 기록(성서에 포함된 복음서나 바울이 쓴 서신들, 초대교회 관련 인물들의 기록)을 배제하고도 다른 자료들에서 묘사된 예수에 대한 기록을 통해 “최소한의 사실들”을 요약하면:
예수는 (1) 실존했고, (2) 십자가형을 당했고 (3) 이적을 행했다고 전해지고 (혹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4) 빈 무덤이 있었고 (5) 사후에 목격되었고 (혹은 그렇게 믿던 사람들이 있었고);
(6) 이스라엘의 메인스트림 종교 유대교에서 기독교라는 새로운 신앙이 생겨났고 (7) 여러 황제들에 의해 박해 받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고;
초대교회과 관련된 사료를 고려하면 (8) 예수의 ‘신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동생 야고보(James)가 변했고, (9) 예수의 처형에 앞서 도망갔던 제자들이 변했고, (10) 예수의 추종자/제자들을 박해하던 사울(사도 바울)이 변해서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주장하고 인생을 바쳐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거죠.
그 원인을 분석할 때,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체험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즉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었기 때문에 위의 사실/기록들이 존재한다 라는 가정을 내리는 게 합리적이라는 거죠. 특별히 유물론적/무신론적/과학주의적 세계관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면.
복음서의 기록이 허구라고 가정했을 때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
다른 방법으로 복음서의 기록이 의도적으로 쓰여진 허구라고 가정하고 ‘생각실험’을 해봐도 앞뒤가 안 맞는 것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 가설을 수립하고 배제법을 통해서 같은 결론을 낼 수도 있습니다.
Q1. 복음서에 서로 다른 내용들, 상충되는 내용이 있다는 걸 과거에 몰랐을까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쓰여지고 관리 되었다면 왜 지금까지 그 차이가 유지 되어왔을까요?
초기에 혹은 로마의 국교가 되었을 때, 혹은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득세했을 때, 이슬람의 우스만이 했던 것처럼 사본들을 모아서 공식버전으로 내용을 조율해서 일치하는 버전을 만들어서 배포했다면 성경의 권위를 더 쉽게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요?
Q2. 왜 초대교회의 교부들의 부끄러운 행실들을 복음서에 실었을까요? 카톨릭에서는 초대 교황*으로 전해지기까지 한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에게 “사탄”이라고 혼나기도 하고, 예수를 모른다고 부정하는 부끄러운 모습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있죠. 종교단체의 수장에 대해서는 신격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작업으로 그런 내용들을 편집할 수 있었겠죠?
(*개신교에서는 실제 교회 역사상 4세기까지는 교황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다른 의견을 제시합니다:
“1) 로마 가톨릭은 인노첸시오 1세, 레오 1세, 그레고리 1세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이전까지는 로마 제국의 가장 크고 중요한 5교구(로마, 콘스탄티노플,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산하 감독들이 사도적 교회들을 이어왔다. 그리고 교구 감독들은 각 교구의 수장(首長)들로 교권을 강화하게 되었다. 각 교구들은 감독들의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 출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제1대 교황인가 (기사) 중 -
Q3. 신화를 만들어낼 목적이었다면 왜 굳이 당시 법적지위가 없다시피한 여성들을 예수의 빈무덤과 부활의 목격자로 “설정”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Q4. 왜 힘이 질서였던 팍스 로마나 시대에 굳이 약한 모습으로 죽어간 식민지/속국 이스라엘의 유대인을 신으로 섬기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Q5. 무력으로 평화를 얻은 로마제국에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라는 가르침은 물론,
원하는 누구와도 (성인 남성과 소년 포함) 성관계를 갖고 미혼남성은 창녀와 성관계를 갖는 게 당연하고 어떤 신전에선 종교행위로 혼음을 하던 성적으로 문란했던 그 시대에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 이라는 가르침을 준 사람을 신으로 모시기 위해 디테일 조율이 안된 문서들(복음서)를 경전으로 삼는다구요?
Q6. 예수 이전까지 나무에 매달려 죽는 가장 치욕스러운 죽음의 상징이었던 십자가형의 그 십자가가 어느 순간부터 인류를 위해 희생한 신이자 신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과 구원의 상징이 된 건 왜일까요?
Q7. 복음서에는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증언하라고 로마병정들을 매수하죠. 리차드 캐리어 같은 사람은 그게 훨씬 더 합리적인 해석이라고 하구요. 사람들이 자기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걸 수 도 있죠. 그게 착각이라고 해도. 하지만 반대로 어떤 게 거짓인줄 아는데 그걸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요? 그저 예수의 시체를 버렸다고 시인하고 평온한 삶을 살면 됐을텐데요.
Q8. 만약 예수가 “죽은 뒤 나의 영혼은 부활 할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면 그 예언은 검증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럼 그 제자들도 그저 영혼이 부활해서 계속 되었다고 한들 누가 반박할 수도 없었을 거구요. 왜 굳이 검증 가능한 예언을 했을까요? 죽고 나서 안 살아나면 그저 끝났어야 할 “예수 운동 (Jesus Movement)"
복음서의 기적을 믿기 위해서 소위 ”믿음“이 필요하지만, 그걸 다 허구로 보기 위해서도 적지 않은 논리적 의문 혹은 모순들을 무시하거나 극복해야 합니다.
한편 현대사회에 고정되어 너무나 당연시 되는 개념들의 기원을 찾아보는 질문들도 다른 맥락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 됩니다.
Q9. 약육강식의 무력으로 평화를 유지하던 로마제국시절의 문화는 기독교가 발생한 이후의 문화와 다릅니다. “약한 게 강한 거고”, “처음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처음이 된다” 같은 약자를 옹호하는 사조가 당시의 기독교 정신이 없이 이 세상에 퍼질 수 있었을까요?
Q10.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너무나 당연시 되는 것들의 유래를 찾아보면 그 기원이 의외로 유대-기독교로 이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지배 계급을 포함한 모든 이들이 법 아래 있어야 한다는 개념이나 범죄자들에게도 다른 모든 사회구성원과 동등한 인권이 있어야한다는 개념은 어디서 온 걸까요?
그 외에도 과학적 발견들이 유신론적 세계관을 지지하는지 살펴 보는 것도 예수에 관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지식들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됩니다.
예를 들면:
- 우주의 기원인 빅뱅을 거슬로 올라갈 때 가르키는 무의 시작점
- 풀리지 않는 생명의 기원에 대한 신비
- 생명의 가장 작은 단위 속에서도 보이는 복잡성
그리고 개인적, 또 간접적 체험도 도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를 “만났다”는 사람들의 이야기, 예수를 “만나고” 삶이 변한 사람들의 이야기 등. 그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간증 이야기 정도가 아닌, 아이작 뉴턴의 프린피키아에도, 현대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릴만한 이름의 종교적 신념을 찾아보아도, 앨런 샌디지(Alan Sandage)같은 천문학자가 무신론자에서 기독교인이 된 과정, 제임스 투어 박사가 무신론적 유대인 가정에서 자라 “예수를 만난 후 달라진 삶”에 관한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그건 사실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상징적으로 또 서사적으로 훨씬 중요하다고도 합니다. 당대에 국한되지 않고 현재에도 통용되고 반복되는 초월적이며 메타적인 진실이라는 멋진 말로 사실여부에 대한 고민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하죠. 그걸 단순한 회피로 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구요.
하지만 내러티브/스토리가 갖고 있는 파워도 물론 중요하지만 사실일 때 갖게 되는 무게감 역시 무시할 수 없죠.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되니깐요.
바울도 말했죠.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자기들의 신앙은 무의미 하다고.
궁극적으로 어떤 자료와 어떤 설득력이 있는 설명도 다음 질문에 대한 답변이 No 일 경우, 의미가 없을 수 있습니다. 이건 본인의 진실에 대한 추구가 진정성이 있는 지를 가늠하게 하기도 합니다.
Q. 만약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고 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이 진실이라면 ‘예수를 받아들이겠습니까’/‘크리스천이 되겠습니까?‘
제 생각엔 우리의 이성이 예수가 진짜 신이라고 해도 판단할 수 있는 충분한 데이터/자료가 제공되어도, 우리는 그걸 믿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지를 부여 받았습니다. 어느 시점에선 선택을 해야 된다는 거죠.
또 감정적으로 누군가에게 “굴복하는 것 같은 기분”이 싫을 수도 있을 수 있구요.
(천국에서 신을 섬기느니 지옥에서 다스리겠다… 라는 노래가사 처럼. *지옥이 있다면 거기에서 인간이 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나이브한 것 같기도..*) 우리 인간은 그런 존재인 것 같습니다. 누가 뭐 시키면 하기 싫어지죠.
”신이 존재한다면 왜 나에게 (혹은 그에게) 자신을 드러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게 하지 않는가?“ 이런 질문도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질문에는 신의 속성을 가정하고 전제하고 있죠. 신이 존재한다면 피조물들에게 강제로라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할 거라는. 그게 공포가 될 거라는 건 예상하지 못한 채로요.
만약 성경에서 묘사한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한 절대자라면 그 신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큰 물결을 일으키기보다는 작은 물결을 통해 일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노아나, 모세이나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굳이 사람을 하나 골라서 움직이고,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그들이 끊임 없이 승리하게 해서 신의 위대함을 증명하게 하지 않습니다.
C.S 루이스라는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이유는 사랑의 성립조건은 자발성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죠.
So…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인가?
팀 켈러 목사와 그의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검증가능하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The Resurrection is historically variable or our faith is nothing.
팀 켈러 & 캐시 켈러
목사로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역사학자였다면 학계가 가진 패러다임의 제한될 수 밖에 없는 현실도 있습니다. (역사는 기적을 검증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죠.)
예수의 부활(원제: The Resurrection of Jesus : A New Historiographical Approach) 의 저자인 역사학자 마이클 라코나 (Michael R. Licona) 같은 역사학자는 “개인적인 체험/경험으로 100% 확신하지만 (학문의 특성상) 역사학자로선 75-80%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라고 한 적이 있죠.
예수의 부활. 그걸 믿는 것이 어쩌면 핵심인 기독교. 그래서 진입장벽이 높은 ”종교“로 정의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나름대로) 검증 가능한” 종교로 만들기도 하는 한편, 가장 믿을 구석있는 신앙이 될수도 있게끔 하겠구요.
전문적인 자료들과 세부 내용을 나누고 싶었지만 2023년에는 부활절에 맞춰 먼저 간략하게(?) 자료와 생각거리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2부에서 다른 자료들로 찾아봽겠습니다.
Happy E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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