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두번째 인사 (이 공간의 존재 이유)

HYOZAN 2021. 4. 10. 05:37

우연이든 알고리듬의 선택이든, (다음 검색엔진의 실수이든..) 이 공간에 와서 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 와주셔서 감사하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년 12월 말에 티스토리를 오픈하고, 4월 초 지금까지 약 1,441명의 사람들이 이 곳을 들렸다갔네요.

적은 수의 사람들이지만  제가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는 주제에 대해 검색을 해보는 것 같습니다. 

 

그걸 기념해서 다시 한 번 이 공간의 존재 목적을 설명해보려 합니다.

※ 광고 같은 걸 붙여서 수익을 얻으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 옆 배너에서 사용자 패턴에 맞춰진 구글 애드센스 광고 같은 게 떠있으면 좀 싫을 것 같아서 일부러 광고는 달고 있지 않습니다. 

1. Perceptual Art 

관점의 예술이란 글에서 한 번 사용한 예화지만 다시 한 번 사용해볼께요.

 

1.1 관점의 예술 (Perceptual Art)

1. 아래 이미지는 마이클 머피라는 예술가의 조형물입니다. 이 예술가는 어떤 이미지는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요? The following image is an art piece of Michael Murphy. What do you think this artist wants..

bitl.tistory.com

제가 아래 이미지를 보여드리고 이게 사람 얼굴이라고 하면 뭐라고 하실 건가요? 

 

<그림1: 관점 A>

Dolly. Portrait of a waste picker from India rendered By Michael Murphy www.perceptualart.com

(예상답안) "무슨 소리에요? 이게 사람의 얼굴일 리가 없잖아요." 

 

아주 당연한 반응입니다. 

저도 저 각도에선 저게 얼굴로 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저를 따라 조금만 움직여 주세요. 

제 관점을 보여드릴께요. 

<그림2: 과정>

Dolly. Portrait of a waste picker from India rendered By Michael Murphy www.perceptualart.com

 

그리고 저와 같은 장소에서 보면 아래와 같은 이미지를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림3: 관점 C>

Dolly. Portrait of a waste picker from India rendered By Michael Murphy www.perceptualart.com

 

이제 사람의 소녀의 얼굴이 보이시죠? 


우리 모두 살아온 삶이 다르기 때문에 소위 "상식"에도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겐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다른 누군가에겐 너무나 이질적인 것일 수 있겠죠.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 노력, 같은 관점에서 보려는 시도는 참 소중하고 '귀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게 디폴트인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니깐요. 


2. Photo mosaic 

아래 사진은 한 사람의 얼굴입니다. 

 

여러 아이들의 얼굴이 있는데 무슨 말이냐구요?

365개의 아이들의 사진으로 만든 포토 모자이크 - 출처 https://www.picturemosaics.com/photomosaics/id/109

Zoom out해서 다시 보여드릴께요. 

다시 한 번 봐주세요. 

 

365개의 아이들의 사진으로 만든 포토 모자이크 - 출처 https://www.picturemosaics.com/photomosaics/id/109

아직도 안 보이시나요?

 

그럼 조금 더 ZOOM OUT할께요. 

 

365개의 아이들의 사진으로 만든 포토 모자이크 - 출처 https://www.picturemosaics.com/photomosaics/id/109

 

관점의 차이이기도 하면서도 어떤 의미에선 소위 ' 빅픽처 Big Picture' 를 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란 생각을 해봅니다. 


3. 증명가능성과 증거

논리적으로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또 어떤 명제는 참임에도 증명할 수 없고, 스스로의 무모순성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Gödel’s incompleteness theorems)

 

아마 기독교의 '애칭'이 개독교가 되게 한 만큼, 기독교를 오해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기독교인일 겁니다. 

 

그리고 과학에 대한 대중의 무한한 신뢰, 미디어에 대한 큰 검증없는 수용 등을 고려했을 때,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속고 있습니다. 언론은 생각보다 객관적이지 않고, 학계 역시 순수한 학문적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 연구가 이뤄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확증편향은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종교가 없는 일반인에게도 존재합니다. 

그걸 인식하는 게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의 첫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약 5년간 많은 토론 영상과 강의를 본 후 전 사람들이 아래 영역에서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다른 입장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신神에 대한 잘못된 정의(definition, 定义), 그로부터 발생한 오해
  • 믿음에 대한 잘못된 정의와 오해 
  • 과학의 한계와 특정 이론에 대한 오해
  • 설명의 정의와 그 오해 
  • 기독교에 대한 거짓말
  •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인지여부

누군가가 기독교가 좋아서 기독교가 '진리'가 될 수 없는 것만큼, 기독교가 싫어서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도 100%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을 납득할만한 확신을 주는 증거는 없습니다.

주관적인 확신만으론 타인을 설득하기 어렵지만, 자신이 경험하고 체험한 '주관적' 사실을 부정하기도 어렵죠.

 

심지어 예수님이 눈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에 입각해서 그 '기적의 순간'을 판단 할 겁니다. 

 

이슬람이 국교인 지역에서는 꿈에서 예수가 나타나서 성경을 찾아서 읽어보고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무슬림들이 있다고 합니다. 한편 '기적은 없다. 자연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눈 앞에 예수가 나타나도, 그걸 환각 내지는 착각으로 해석하려고 하겠죠. 

 

철없던 시절 연애 관계 속에서 여러번 배신을 경험한 청춘이 "사랑은 존재하지 않아" 라고 믿고 상처 받은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가정해볼께요. 이 사람은 어느 미래에 정말로 자기를 사랑하는 진짜 사랑을 만나게 되어도 본인이 사랑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을 놓치게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 사랑이 정말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본인이 자기 경험에 입각해서 '사랑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죠. 

 

객관적인 것들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주관적인 비유를 들어서 적합한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공부를 안했는데 성적이 잘 나왔어' 정도를 '기적'이라고도 부르지만 진짜 '기적'이 세상에 존재하는 지 아닌 지가 궁금하다면 '기적'의 가능성을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라도 열어둔 채로 탐구해봐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기적은 불가능해. 기적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지' 라는 과학주의의 순환 논리는 '성경은 진리이다. 성경에 그렇게 쓰여있기 때문이지'와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 순환논리를 내려놓지 않으면 이 주제에 대한 고민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거에요. 그저 자기 생각의 메아리 속에 갇혀 자기 관점과 다른 모든 의견은 들어보기도 전에 판단할테니깐요. 

 

존 레녹스와 피터 애킨스의 토론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이 두 사람의 대화도 번역하여 블로그에 올려볼까 합니다.)

 

 

기독교에 대한 거짓말과 오해는 알고나서 기독교를 거절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개독교'는 저도 싫어요.

 

근데 이성적인 기독교인도 개독교를 싫어하고 안티기독교인도 개독교를 싫어하면, 개독교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닐 겁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인간은 신을 거절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엔 악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죠.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은 질문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왜 세상에 고통을 만들었냐?

악이 왜 존재하냐?

왜 죽음이 있냐?

왜 기독교 목사들이 뉴스에 나올 짓을 하냐?

 

이 질문들에 대해 제가 (아마 많은 지성인들의 답변을 참고해서)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득력있게 답변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 질문들에 대해 반박불가한 답변을 들으신다면 기독교에 대한 악감정이 사라질까요? 

 

예를 들어, 고통이 과연 나쁜가-에 대한 의문은 이런 답변들이 떠오릅니다.
고통으로 단련되서 성숙해지는 사람, 통증이 있음으로 역설적으로 안전을 확보하게 되는 우리 신체 (통증을 못 느끼는 사람은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악의 존재 이유는 도덕적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 자연재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지구 행성단위의 생태계 차원에서의 거대한 섭리와 인간의 책임과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죽음이  없으면 아마 우린 삶의 소중함을 모를 수 있겠다는 게 감성적인 답변. 좀 더 냉철한 답변을 생각해보자면, 물리적 신체를 가진 인류가 자원이 한정된 (혹은 자원의 생산이 한정된) 지구에서 죽지 않는 존재로 살아갔더라면, 지구는 진작에 포화 상태가 되어서 저희가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지 않을까요? 

 

물론 그러면 '전지전능한 신이 그런 문제가 없는 지구를 만들면 되지 않은가?' 라고 다시 반문할 수 있겠죠.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지구는 지금 이런 상황이니 그런 질문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만약 기독교의 세계관이 맞다면, 인간은 영혼이 본질적인 존재이고, 육체의 시간 이후에 존속합니다. 그러니 죽음이 끝이 아닌게 되죠. 

 

우린 많은 질문을 할 수 있고, 종종 의문점을 갖을 수 있다면 어떤 걸 믿지 않아도 되는 타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을 수 있죠. 그리고 질문의 방향을 바꿨을 때, 의미 있는 전진이 가능합니다. 

 

종교는 검증불가한 영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검증할 수 없다' 라는 전제에 대해 의문을 갖아보겠습니다.

 

기독교는 인류 역사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검증이 가능한 부분이 꽤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할 수 있게 되죠. 

 

  • 이스라엘 역사 속에 성경에 기록한 사건들이 존재하는가? 
    (초자연적인 걸 검증하기 어려우니 일단 역사적 사건들을 위주로) 
  • 과거에 쓰여진 예언이 그들의 미래 안에 일어났는가? 
    (예를 들어 '예레미아 서' 라는 책에서는 이스라엘이 겪게 될 적국의 침공, 포로생활 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는지? 다른 국가의 역사적 기록, 고고학적 근거를 통해 지지할 수 있는 학설이 있는지 등) 
  • 예수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는가?
  • 예수에 대한 기록은 신뢰할 만한가?
  • 성경의 세계관이 과학적인 세계관과 부합하는 가, 반대되는가, 무관한가 ?
  •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윤리가 인류의 번영과 발전에 도움이 되는가?
    (정말로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 인생의 매뉴얼은 그 창조자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거고, 그게 맞다면, 그 매뉴얼을 읽어보는 게 의미가 있겠죠. 만약에 신이 살인하지 말라- 라는 명령을 우리의 도덕적 기준의 잣대로 줬다면, 정말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게 당연하고 옳은 거고, 거짓말 하지 말라- 라는 명령 역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볼 수 있겠죠.) 
  • 성경에 묘사된 설명과 자연 과학적 세계관과 상충하는가?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잘못 비교하는 걸 제외하면,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 라는 태초에 대한 묘사가 우주의 시작점이 있었는가, 아닌가?)

그리고 거기서부터 보다 의미 있는 탐구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우연이든 알고리듬의 선택이든, 검색엔진의 실수이든 (종종 있더라구요..) 이 공간에 와서 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 와주셔서 감사하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하게나마 제 글과 자료가 여러분만의 '생각실험 Thought experiment'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