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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N-OFF: 사랑에 대한 오해/요상(辽想)한 아빠의 육아 이야기

육아특집: 1부-유행하는 육아 철학 vs. 성경의 잠언 (feat. 조던 피터슨)

0. 들어가는 말: 근황 (접음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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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애가 이제 겨우 830여일을 산 첫째, 500일 차이 나는 둘째, 연년생 아이들을 키우는 육아를 겸직으로 하고 있는 아빠로서 블로그 할 시간이 너무 안나서 아주 오랜 만의 글이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육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다보니 최근의 육아 '트렌드'에서 보게 된 경향에서도 '오해'를 발견하게 되어 그걸 주제로 글을 써보게 되었습니다. (집이 직장 근처라 평소에 점심을 집에서 먹는데, 오늘은 아내와 아이들이 외출을 한 날이라 시간이 생겼거든요!)

※ 블로그의 방향성을 위해 '오해'라는 테마에 맞는다면 어떤 주제도 끌어올 수 있어서 좋네요.

! 육아 철학에 대한 주제는 각 가정의 개인적인 영역이라 본의 아니게 읽어주시는 분들의 가치관과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지적'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될까 걱정이 되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습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는 것과 '문제에 대한 비평'이 꼭 '개인의 선택에 대한 공격'과 동일시 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기억해주실 수 있으면 좋겠어요. 프로도 전문가도 아닌 3년차 직딩&육아 대디가 고민을 하는 과정 중에 공부하며 알게 되는 정보라는 점 양해해주시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총 3부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육아 특집을 통해 저도 배우고 그 배움을 나누고자 합니다. !

 

1. 21세기 최근 육아 경향에 대한 질문

 

생략해도 좋을 조사 배경 (접음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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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률, 아이들의 수가 감소하고 있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요즘 사회이지만 줄어든 수에 반비례하게 육아에 대한 관심은 증가한 것 같습니다. 오은영 박사님이 출현하는 프로그램 같은 육아를 소재를 한 프로그램도 장르를 달리하며 TV편성표에 자리하기 시작했구요.

지상파 3사에선 육아 프로그램인 MBC의 지오디(g.o.d.)의 육아일기 라는 옛날 프로그램부터 한 때 대표 주말 예능으로 자리잡았던 KBS의 '슈퍼맨이 돌아왔다' , SBS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가 있고, 케이블사에선 채널A의 '금쪽 같은 내 새끼' 가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결혼 전에도 아이가 없었을 때도 심리학에 관심이 있어 배경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전문가들의 해석이 나오기 전에도 부모의 행동, 아이들의 행동, 부모-아이의 상호관계를 보며 어떤 게 문제점이겠구나 하면서 봤던 기억이 있네요. 물론 아이가 없었을 때는 아이들이 소리지르고 공격성을 드러내는 장면을 굳이 시간을 할애하여 보고 싶지 않아서 그런 프로그램들을 특별히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 삶의 현장에서 육아와 관련 고민들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며 체감하며 살아가고 있죠.

문화 속에 만연한 '사랑만능주의'가 교회에도 가정 안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는 건 아닐까 ... 이런 의문이 생겼고, 전 세대의 주류 심리학이었던 프로이트의 이론들을 대신 유행 하게 된 아들러 (Alfred Adler)의 '긍정심리학(개인심리학)'이 자리 잡은 것 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영어권에서는 '나쁜 아이는 없다. 나쁜 부모가 있을 뿐이다(There are no bad children, only bad parents)' 라는 말이 격언처럼 사용되고 있고, 체벌은 어떤 경우에도 금지하는 게 디폴트가 되었죠. 한국에서도 이런 추세에 맞춰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 같습니다.

*프란시스코 페레(Francisco Ferre)라는 '자유교육'을 옹호하던 스페인의 교육 '순교자'에 대해 쓴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

 

스티븐 잡스 같은 '천재'를 기른 부모는 어떻게 아이를 키웠을까? 라는 질문에 답하는 책들도 한 때 유행했던 것 같네요. 그리고 입양아였던 스티븐 잡스는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라며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것'이라며 많은 청년들의 취업진로에 (제 생각엔 비현실적인) 영향을 미쳤죠.

 

전 초등학교 6학년 때 한국을 떠났고, 중국에서는 기본적으로 체벌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 교육자에게 맞아본적이 없습니다. 가끔 방학 때 돌아와 한국에서 중학교 생활을 보내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드라마나 영화에서 선생님에게 맞는 학생들을 볼 때면 그렇게 마음이 불편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체벌의 불필요성에 대해서는 굉장히 공감하는 걸 기본으로 여러 '공부/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게 된 육아 트렌드에 대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 어린 아이는 본질적으로 선한가요? 그렇기 때문에 그 선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잘 '지켜봐주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 훈육은 늘 부정적인 언어(금지) 대신 긍정적인 언어(주의전환)를 사용해야 하는 걸까요?
  • 체벌은 아이에게 폭력을 가르칠 뿐일까요?
  • 체벌은 어떤 경우에도 피해야 하나요?


우리는 시대적으로 "사랑"을 찬미하는 시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을 믿지 않더라도 '사랑'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으로 종종 서로 다른 뜻으로 '사랑'이란 단어를 얘기할 때도 많죠.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건 당연합니다.
아이에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기본적으로 있죠.

하지만 그 사랑이 무엇을 포함하느냐- 에 대해서 세세히 이야기해보면 개인마다 또 각 가정 마다 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편인 저는 '객관적/과학적으로 유익한 것', '장기적으로 아이에게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것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 +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내는 '장기적인 효과를 고려하기 보단 일단 현재의 만족과 현재의 위로를 우선'하는 등 한 가정 안에서도 방향성의 차이가 있죠. 이건 개인적 성격차이, 갈등해결 방법, 또 성별에 따른 보편적 차이도 영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모든 부모들이 다 같이 "아이들의 만족(행복)"이란 키워드를 최우선을 삼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만족을 최우선 순위로 삼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것, 하자는 것을 다해주는 것이 아이에게 유익한지는 당연히 아이의 성장 단계(나이)에 따라 다를 수 있겠죠. 마찬가지로 사랑은 관용과 인정을 포함하지만 무조건적인 관용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유익할지는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판단해야 하겠죠.

개인주의와 자율성을 중요시 하는 서구문화에서 출발하는 현대 교육 철학은 아이를 대하는 '사랑'을 말할 때, 주류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유와 존중"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결혼 전부터 육아와 관련해서 자주 들어온 내용입니다.

"아이는 본질적으로 선하고 무엇이 자기에게 좋은 지 잘 알기 때문에 최대한 간섭하지 말고 그냥 놔두고 칭찬해주면 잘 자란다. "
"안된다는 말을 하거나 잘못한 걸 지적하지 말고 다른 걸 하게 유도해라(주의전환) "

한국의 기존 교육 풍토에서 억압 받아오며 자라온 요즘 부모들에게 참 따뜻하게 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 더 유행할 수 있게 되었겠죠.



2. 우리들이 경험한 부모의 실패와 부모된 우리들의 실수

 

"우리 부모님은 정말 이상적인 부모였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각자 나름대로 가정의 우여곡절이 있고 그런 배경 속에서 자라며 입은 상처들이 있겠죠. 그래서 그런 부정적인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 아이들에게 더 좋은 부모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의식적으로 보고 배운 잘못된 태도와 전략이 아이들을 대할 때 드러날 때가 있을 거고 그럴 땐 한층 죄책감이 커지고 반성하는 마음으로 더 유하게 대하려고 노력하겠죠.

혹여나 정말 엄격하거나 가정폭력에 준하는 힘든 성장배경 속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더더욱 폭력에 대한 거부감으로 '훈육'과 '체벌'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게 정답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하면 안되는 게 많았던, 규칙이 많은 집안에서 자란 아이가 부모가 되었다면 '규칙이 없는 게 규칙'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겠구요.

팀 켈러 팟캐스트에서 들은 예를 사용하면, '어렸을 때 부모님이 억지로 교회를 가라고 했다. 그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난 우리 아이가 교회에 가지 않게 할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부모가 있을 수 있죠. 그게 정말 아이가 원하는 건지, 아이에게 좋은 건지에 대한 고민 없이 개인적 경험에 인한 결론을 낸 거죠.

하지만 이런 경험에 근거한 결론은 가끔 성급한 결론이 되기도 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 선택이 정말 아이에게 좋은가 나쁜가를 고민하기 전에 내 경험 속의 그것이 나빴기 때문에 선택지에서 배제하게 되는 거죠.

 

3. '어린아이는 선하다?' : 성선설 vs 성악설

 

어떤 관념이 오랜 기간 동안 유행하게 되면 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디폴트'가 되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진리'라고 생각되기 쉽습니다. 지동설(地动说)을 믿고 살았던 이들이 '많았던' 때 (모든 사람들이 지동설을 믿었다는 것은 현대인들의 오만한 착각) 와 천동설(天动说)이 디폴트가 된 지금. 이걸 믿고 있는 우리 개개인이 과학적으로 뛰어나서 그 근거를 연구, 검토해서 그걸 믿은 게 아니라 과학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발견한 걸 교육기관에서 가르쳤고 그걸 받아드렸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죠.

 


자기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낸 교육철학자 - 장 자크 루소

 

그런 의미에서 '어린아이는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믿음은 크게 보면 유가의 사상가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에서 주장한 학설(인간의 본성의 선하다)과 같은 맥락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어린 아이는 본디 순수하고 선하지만 자라나며 '문화와 사회' 때문에 타락하게 된다는 믿음은 '에밀(Émile, ou De l'éducation)'의 저자인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영향이 크다고 합니다.

Jean-Jacques Rousseau © Photos.com/Jupiterimages


루소의 삶을 살펴보니 생후 5일 째 출산 후유증으로 어머니를 여읜 어린 시절이 눈에 들어왔고, 성인시절엔 여러 귀족부인과 사귀었지만 하녀 마리(Marie-Thérèse Levasseur)와 오랜 동거 후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5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자신은 아버지로서 무능한 사람이라며 아들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고 하네요.
루소의 저서 '에밀'은 이상적인 교육에 대해 이야기 하는 책이고 교사 중심(Teacher-centered)인 설명 위주의 교육에서 아이 중심(Child-Centered)의 호기심과 발견에 촛점을 맞춘 교육을 이야기 합니다. 한편, 여성은 교육 받지 않아야 된다고 주장해서 많은 페미니스트 저자들의 비평을 받았다고 해요.


이상적인 교육론을 가졌지만 직접 아이를 부양하지 않은 프랑스 철학자 루소의 영향을 받았다는 부분에서 조금 경계심이 생겼습니다.


육아와 성악설, 그리고 성경

순자(荀子) ※여자아님

또 다른 유가의 (유교)사상가인 순자(荀子)성선설(性善說)의 반대인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고 이 입장은 위에 언급한 루소의 사상과 반대되며 기독교 세계관에 부합한 주장이 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인간이 절대로 '본디 선하다' 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태초의 인류에 대한 이야기 '아담과 하와'가 역사적 사실인가 비유인가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 입장이 갈리지만 첫 인류인 두 부부의 행위 자체를 보면 두 사람은 신에게 선물 받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유일한 규칙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죠. 그리고 책임전가(blame-shifting: '얘가 시켜서 그랬어요')를 하는 모습을 보이죠.
※이것에 대한 의미는 뭘 먹어라 먹지 말아라 하는 명령에 대한 불복종이 아니라 '내가 신/하나님이고 넌 피조물이고 선과 악의 기준은 나(신)이다' 라는 '첫 세상'의 규칙을 어겼다는데 있습니다.
인류 첫 부부의 형제 둘은 어떤가요? 인류사가 시작하자 마자 제일 먼저 살인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이후에도 창세기를 비롯한 많은 성경 속의 내러티브(이야기)에서는 인간이 반복하는 죄악에 대해 묘사합니다. '어떻게 살아라'라고 가르치는 도덕적 가르침 대신 반면교사의 이야기가 가득하죠.

 

개인적 육아 경험 [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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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키워보신 부모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선하던가요?
아내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생후 100일 때까지, 특히 세상에 탄생하는 그 날까지 (경우에 따라 몇일) 아이가 준 '즐거움(Pleasure)'과 '고통(pain)'(혹은 고생) 중 어느 쪽이 더 많은가요?
아이로부터 정서적인 '기쁨'을 받은 부모도 분명 있겠지만 가시적이지 않은 물리적인 영역만 봤을 때 태아는 엄마를 무겁게 하며 자라나고 신생아는 엄마를 아프게 하며 태어나서 엄마를 아프게 하며 젖을 먹습니다. 아이의 생존과 성장은 어머니의 고통을 기초로 해서 유지됩니다.
물론, 그렇게 고생하며 키우는 아기가 부모의 손가락을 꼭 쥐고, 눈을 마추고 웃고, '엄마, 아빠' 불렀을 때 얹게 되는 기쁨 또한 그런 고생을 잊게 할 정도로 큽니다.
하지만 만약 절대적인 선과 악을 논하기 싫어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기준인 '고통=악' 이라고 규정한다면, 아기는 도덕적 개념을 갖기 이전부터 악을 가지고 있다고 억지를 부려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서는 타인의 고통이 필수이니깐요.

첫째 아이가 조금 더 자라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조금씩 더 생기고 소위 '자아'가 발달하면서 고집이 생깁니다. 지 먹으라고 떠 먹여주는 숫가락을 쳐내고 물건을 던지며 부모의 기분을 상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배려요? '배려'는 영유아에게 내재된 본능이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 둘째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제 한살 반이 안된 첫째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웃으며 다가오더니 태어난 지 몇 주도 안된 아기의 머리를 퍽 하고 때립니다. 아이가 울어도 미안한 감정 따윈 보이지 않습니다. 저희 아이가 싸이코패스 기질이라서가 아니라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가 타인의 감정,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시기라서 그랬던 거 겠죠.
이제 첫째아이는 조금 말을 알아듣고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이의 행동을 제재 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그런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걸 모르고 자란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이럴 때 사용되는 것이 '훈육' 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이제 세살도 안된 아기 아빠의 짧은 경험은 사실 큰 의미가 없으니 적어도 3,000여년 동안 전해내려온 기독교 경전 성경에서는 뭐라고 말하는지 찾아봤습니다.
우선 소위 '지혜서' 라고 불리는 성서의 3권 중 '잠언'이라는 책을 찾아보니 이런 구절들이 있었습니다.

마땅히 걸어야 할 그 길을 아이에게 가르쳐라. 그러면 늙어서도 그 길을 떠나지 않는다.
(잠언 22장 6절, 새번역)
Direct your children onto the right path,
and when they are older,
they will not leave it.
(NLT)

아이들은 처음부터 스스로 갈 길을 찾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걸어야 할 길, '옳은 길' (right path)을 가르치면 그 후에도 그 길을 따라 걷는다고 합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혀 있으나, 훈계의 매가 그것을 멀리 쫓아낸다.
(잠언 22장 15절, 새번역)
A youngster’s heart is filled with foolishness,
but physical discipline will drive it far away.
(NLT)

아이의 마음에 '미련한 것이 얽혀있다' 라고 번역한 한글의 틴데일(Tyndale)사의 New Living Translation(NLT)사의 번역을 보면 '~is filled with foolishness', '어리석음/바보같음'으로 가득 차있다고 합니다.

한편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 아이들아, 아버지의 훈계를 잘 듣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말아라.
진정 이것은 머리에 쓸 아름다운 관이요, 너의 목에 걸 목걸이이다.
(잠언 1장 8절)
My child, listen when your father corrects you.
Don’t neglect your mother’s instruction. (NLT)


물론 이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지 못한 우리들은 부모의 잘못된 모습이 먼저 떠오를테니 저걸 따를 수 없다고 생각하기 쉽겠죠.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부모가 우리가 경험한 부모라고 한정 짓는다면 그것도 주관적인 판단의 한계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님'(신/여호와)가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려줍니다.

아이들아, 주님의 훈계를 거부하지 말고, 그의 책망을 싫어하지 말아라.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꾸짖으시니, 마치 귀여워하는 아들을 꾸짖는 아버지와 같으시다.(잠언 3장 11-12절, 새번역)

My child, don’t reject the LORD’s discipline,
and don’t be upset when he corrects you.
For the LORD corrects those he loves,
just as a father corrects a child in whom he delights. (NLT)

꾸짖는다고 번역한 표현의 영어를 보면 'correct', 즉 '바로잡다', '교정하다'라는 뜻의 단어를 썼습니다. 사랑은 자녀가 잘못된 길을 걸을 때, 고쳐준다는 거죠. 자녀가 있는 부모들은 어린 아이가 위험한 일을 하려고 하면 말리려 합니다. 아이의 그 바람(욕망)이 아이에게 해가 되기 때문이죠. 성경 속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보면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에게 득이 된 적은 없습니다.

 

※당시 문화의 '우상숭배'는 현대인이 생각하듯이 그저 다른 신을 숭배한다는 게 아니라 그런 숭배 의식에는 아기를 태워죽여서 제물로 바친다거나 하는 영아살해를 포함했습니다. 이런 문화가 있는 국가 문명이 계속 번영할 수 있을까요? 고대 마야 유적지의 발굴도 그렇고, 여호수아의 이야기에 나오는 여리고성 근처의 게셀(Tel Gezel)에서의 발굴을 통해서도 영아를 제물로 받치던 문화의 흔적이 나타납니다.

팔레스타인 게셀에서 발굴된 영아 제물의 유골


잠언을 보면 지혜로운 아이는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드리고, '비웃는자'는 교정을 거부합니다. '어리석은 자'만 부모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 가르침(교정/지적)으로부터 배우는 자는 지혜롭다고 합니다.

물론 아래 신약성경의 구절과 같이 '가르침'의 태도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도록 할 것을 주의시키기도 합니다.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부모의 훈육이 일방적인 잘못된 통제가 되는 걸 또 주의시켜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어버이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을 격분하게 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기를 꺾지 않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3:21)
Fathers, do not aggravate your children, or they will become discouraged. (NLT)


기독교 세계관에선 아이들만이 아니라 부모들 역시 '선과 악'의 잠재성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부모들이 각자의 성장배경 속에서 배워온 나쁜 것들이 자연스럽게 나올 때도 있고, 부모의 욕심이 아이를 통제 하고자 하는 마음의 근원이 될 수 있으니깐요.

신약성서의 또 다른 책(서신 모음집)인 에베소서 6장에선 부모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 된 이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하신 약속입니다.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에베소서 6:1~4, 새번역 )
Children, obey your parents because you belong to the Lord, for this is the right thing to do. Honor your father and mother.” This is the first commandment with a promise: If you honor your father and mother, “things will go well for you, and you will have a long life on the earth.” Fathers, do not provoke your children to anger by the way you treat them. Rather, bring them up with the discipline and instruction that comes from the Lord. (NLT)


아이들은 물론 '순수' 합니다. 순수라는 말은 예쁘게 들리지만, 단순하다는 말도 됩니다. 또 단순이라는 단어는 '심플'이라는 외래어가 주는 긍정적인 이미지와 '충분히 지적이지 못하다 = 단순무식하다' 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모두 가지고 있죠.

학창시절 읽었던 '드래곤볼'이란 만화책에서도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 될 수 있다는 초사이어인의 경지가 있는데, 악당으로 등장해오던 베지터란 캐릭터가 초사이언이 되자 주인공들이 놀라며 의아해 하죠.
그리고 베지터는 대답합니다. '내 마음은 순수하다. 순수한 악으로.'

아마도 모든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고 (혹은 생겨나고)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선과 악'에 대한 초월적 기준이 생겨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폭력을 배운다면 (혹은 강요 받는다면) 어떨까요? 그래서 전세계 90개국의 총 50만명이나 된다는 '소년병' (기사) 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요? 정말 아이들이 선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늘 옳은 걸 선택할 수 있다면, 저런 비극적인 현상은 없어야 하겠죠.

 

저렇게 폭력을 생존의 수단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소년병의 현실에서 '폭력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라고 분석하는 건 나름대로 합리적이지만, '가르치지 않았다면 선했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그건 증명되지 않은 낭만적 전제를 적용시키는 게 됩니다.


아이들은 사회구조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에 성인들의 교육에 따라 악하게 자랄 수도 있고 선하게 자랄 수 있다고 보는 게 좀 더 합리적인 게 아닐까요.


※게시물 공개 후, 존경하는 작가 팀 켈러 박사의 잠언 묵상집* '9월 29일부터 10월 14일까지 자녀 양육을 주제로 잠언을 묵상하는 것을 뒤늦게 발견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3부에서 종합 정리를 하며 인용할 예정입니다. 

 

*: 책 제목: '팀 켈러, 오늘을 사는 잠언' (번역본 링크| 전자책 | 원서_킨들 $11.90 | 원서_하드커버 ) 기독교인인데 이거 안 읽어봤다 - 하시는 분은 꼭 읽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지혜를 추구한다면서 잠언을 많이 읽어본 사람들에게도 전문가의 해석과 묵상이 깊이 있는 깨달음을 줄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4. 사회가 (원래 선한) 아이들을 악하게 성장시켰다?


캐나다의 심리학자이자 뉴욕타임즈에서 '현대 서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고 불린 조던 피터슨 (Jordan B. Peterson)은 그의 책 <인생의 12가지 법칙 (12 Rules for Life)>의 5장*에서 훈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장 자크 루소의 사상에 대한 반박의 근거로 영국의 영장류학자 제인 구달(Jane Goodal)의 연구기록을 제시합니다.

(c) 내셔널 지오그래픽

*


제인 구달은 나름의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침팬지들을 관찰한 결과, '순수한' 침팬지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목격하고 기록한 것을 인용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어느 만화에서인가 '동족상잔을 하는 것은 인간뿐이다'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동물의 세계를 알면 알수록 그게 그저 낭만적인 착각이라는 걸 알게 됐었죠. 인간사회가 인간을 악하게 한 것이 아니라 인간과 가장 유사하다고 하는 영장류인 침팬지 사회에서도 믿을 수 없는 잔인한 폭력이 존재한다는 거죠. (동료 침팬지 두 세마리가 모여서 서열 1위의 동료를 찢어죽이는 행위 등..)
※그녀의 저서 'Through a Window: My Thirty Years with The Cimpanzees of Gombe')에서 상세히 묘사됨. 그걸 목격한 저자는 한동안 꿈에서 그 장면을 보며 악몽에 시달렸다고 함.

(C) Institut Jane Goodall France


진화론을 부정하지 않는 조던 피터슨은 그렇게 모든 인간에게도 침팬지와 같은 폭력성이 잠재되어있다고 주장합니다. 책을 쓸 당시에는 기독교 가치관과 전통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무신론자였던 조던 피터슨은 순전히 진화생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인간에 내재된 잠재적 악(폭력)'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리고 학창시절엔 흔하던 약한 사람을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현상이 성인 사회에서는 확연히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Olweus, D)와 본인이 아이 둘을 키우며 또 임상심리학자로서 배운 이론과 경험을 바탕으로 훈육의 필요성에 대해 심도 있게 이야기 합니다. (이 내용은 저희 집 육아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 세히 적어보려 합니다.)

 

 

5. 조던 피터슨의 제안

 

전 육아 경험이 짧습니다. 관련 학위도 없고 연구한 바도 없습니다. 그래서 심리학자가 제시하는 것을 소개하고 거기에 대한 생각을 적어보려 합니다. 몇 주전 어느 날 우연히 책을 폈는데 다섯번째 법칙이 육아에 관한 거라 한글과 영어로 여러 차례 읽은 후 글을 씁니다.

 

법칙 5 - 아이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면 처벌을 망설이거나 피하지 말라

(원어: Do Not Let Your Children Do Anything That Makes You Dislike Them)
원서와 번역본(역자:강주헌)을 둘 다 읽어보는 중인데 이 책의 번역에 대해선 좀 의문이... ;;물론 번역은 엄청 어려운 일이지만 베테랑 번역가 강주헌님께서 영어 표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번역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임. 제목은 챕터의 핵심을 전하고자 합리적인 시도를 한 거로 해석됩니다.


조던 피터슨은 책에서 현대 사회에서 부모들이 훈육과 체벌을 무조건적으로 회피하는 경향에 대해 지적하며 그런 부모들의 선택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여러 사례를 통해 설명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 대한 관심과 간섭대신 방치와 방임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일단 저자가 경험한 세상인 영어권-미국과 캐나다 등의 이야기겠죠? 통계를 본 적은 없지만 한국의 경우 저희 윗세대를 기준으로 주로 통제적인 부모가 많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

책에선 공항에서 비명을 지르며 우는 아이로 시작해서, 밥 먹기를 거부하는 이웃집 아이 (그렇다고 아이를 하루 종일 먹이지 않는 아이의 어머니), 놀이터에서 만난 조던 피터슨의 딸을 장난감으로 때린 이웃집 남자아이 (그 아이가 나중에 여동생을 유리테이블에 밀쳐도 놀란 여동생 대신 아들을 안고 나지막이 '그러면 안돼' 하면서 다독이는 엄마) , 자는 걸 거부하고 밤 늦게 나와서 TV를 보는 이웃집 아이 등의 여러 사례가 등장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쇼핑몰에서 떼를 쓰며 우는 아이, 식당에서 무분별하게 통제없이 위험하게 노는 아이, 차들이 다니는 주차장에서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 등이 떠오르네요.

부모들은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서 선택한 '용인/방임'을 조던 피터슨은 '자상한 무관심'이라고 부릅니다.

Jordan Peterson

"관심을 받지못하면 어린아이는 정신적,육체적 학대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피해는 무관심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지 의도적으로 위해를 가하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피해의 정도는 그에 못지 않다. 게다가 오랜 기간 지속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원문) Children can be damaged as much or more by a lack of incisive attention as they are by abuse, mental or physical. This is damage by ommission, rather than commission, but it is no less severe and long-lasting. (p.145)

-<12가지 인생의 법칙> 제 5장 中-

 

부모의 '자상한 무관심'으로  인해 아이가 규칙과 절제를 배우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바로 어린아이 자신이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아이와의 갈등과 충돌을 피하고자 잘못을 교정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아이가 궁극적으로 피해를 본다.
.....(생략)....
이런 아이들은 또래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함께 놀기에 좋은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인도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정작 당사자는 자신이 배척당한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12가지 인생의 법칙> 제 5장 中-

 

조던 피터슨은 어린이집에서 근무할 때의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이 자신이 뭘하고 있던 자기 곁에 주저 앉거나 드러눕는 것에 대해서.

 

이런 행동은 어른에게 관심을 받으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아이에게 어른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기분이 상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돌봐야 할 다른아이들도 있어서 마냥 받아줄 수는 없었다. 제대로 사회화 되지 않은 아이와 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부모의 방치로 인해 생기는 의존적 성향은 임시방편적이고 부적절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의존을 받아주려면 엄청난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응석을 받아주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실제로 내 경험은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흔히 겪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비용 편익 비율(cost-benefit ration)이 훨씬 낮은 아이, 즉 돌보는 데 큰 수고가 들지 않는 아이에게 관심을 돌릴 가능성이 크다.

-<12가지 인생의 법칙> 제 5장 中-

 

아이의 자존감 또는 아이의 창의력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까봐 아이의 어떤 행위에도 제재를 가하는 걸 무서워하는 부모들이 많다며 여기에 대해 조던 피터슨은 말합니다.

자녀 훈육은 책임감 있는 행위이다. (※[번역본 오류] 자녀훈육은 책임이 따르는 행위다.)훈육은 잘못된 행위에 대한 분노가 아니고, 그릇된 행위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공감과 장기적 판단을 세심하게 결합한 행위이다. 적절한 훈육을 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하다. 자녀에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기는 쉽지 않다.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올바른지, 또 왜 그렇게 구분해야 하는 지를 알아내기도 어렵다. 공정하고 올바른 훈육 전략을 세우기도 어렵고, 자녀 양육과 관련된 모든 사람과 그 전략을 공유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자녀를 틀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환영 받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견해가 퍼지면 아이들의 사회화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게 되고, 오히려 훈육이 아이들에게 해롭다고 합리화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아이를 파괴하는 자기기만 행위이므로 절대 용납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합리화는 이뿐만이 아니다.

[원문] It is an act of responsibility to displine a child. It it not anger at misbehavior. It is not revenge for a misdeed. It is instead a careful combination of mercy and long-term judgement. Proper displine requires effort -- indeed, is virtually synomous with effort. It is difficult to pay careful attention to children. It is difficult to figure out what is wrong and what is right and why. It is difficult to formulate just and compassionate strategies of discipline, and to negotiate their application with others deeply involved in a child's care. Because of this combination of responsibility and difficulty, damaging can be perversely welcome. Such a notion, once accepted, allows adults who should know better to abandon their duty to serve as agents of enculturation and pretend that doing so is good for children. It's a deep and pernicious act of self-deception. It's lazy, cruel and inexcusable. And our proclivity to rationalize does not end there. (P.146.)

창의력에 해를 입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죠.

규칙들이 없으면 무한히 펼쳐나갔을 내재적 창의력이 (※[번역본의 의역]: 어른들의 교육과 참견 때문에) 규칙들 때문에 제약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여러 연구 결과를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아이들의 창의력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96) 그리고 엄격한 제약이 창의적인 성취를 방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촉진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97) 법칙과 체계가 아이들을 파괴한다는 믿음에는, 충분히 기회를 주면 아이들 스스로 언제 밥을 먹고 무엇을 먹을지 훌륭히 선택할 수 있다는 의견이 짝으로 붙어다닌다. 이런 생각은 근거없는 추정이다.
[원문] We assume that rules will irremediably inhibit what would otherwise be the boundless and intrinsic creativity of our children, even though the scientific literature clearly indicates, first, that creativity beyond the trivial is shockingly rare(96) and, second, that strict limitations fascilitate rather than inhibit creative achievement(97). Belief in the purely destructive element of rules and structure is frequently conjoined with the idea that children will make good choices about when to sleep and what to eat, if their perfect natures are merely allowed to manifest themselves. These are equally ungrounded assumptions.

개인적인 경험과 비교해 보면 동의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제가 군대라는 규칙과 제약 속의 환경에 갇혀 있었을 때 만든 곡의 수량이 제가 자유의 몸이 된 후 만든 곡들의 몇 배가 됩니다. 오히려 그런 갇힌 환경의 억압이 창작에 대한 욕구를 발현시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정말 특이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가 아닌 이상은 모두 규칙을 먼저 배우고 그 규칙 안에서의 창작을 마스터한 후, 그 규칙을 넘어서는 창작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많은 클래식의 대가들은 정해진 규칙 안에서의 창작을 통해 수많은 명곡을 만들어냈고, 재즈는 그런 클래식의 시대 다음에 새로운 유형과 화음들을 만들어냈지만, 음계 전체를 바꾼다거나 시스템을 파괴하지 않았습니다. (잘못된 적용과 예시일수도 있겠습니다)


번외: 부모의 무관심에 대해 아이가 받은 스트레스

위와 다른 맥락이지만 무관심이 아이에게 주는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조던 피터슨의 책 이전에도 넷플릭스에서 본 아기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도 봤던 기억이 있네요. 첫째 출산 전에 봤던 다큐멘터리인데 여기서도 많이 배웠어요.

(c) Netflix

다큐멘터리를 통해 처음 알게된 메사추세츠 대학교의 에드 트로닉(Ed Tronik) 박사의 "Still Face Experiment" (무표정 실험)에서는 어머니의 무표정에 아이들이 느끼는 스트레스에 대해 연구가 있었습니다.

이 실험의 목적은 아직 언어를 습득하지 못한 아이가 어떻게 양육자와 사회상호작용을 할 수 있는 지에 알아보기 위해서였는데, 실험에 참가한 만 1세 정도의 아이와 어머니를 카메라에 앉히고 실험이 시작됩니다. 처음엔 엄마가 아이에게 이야기하고 여러 가지 표정을 만들며 웃고 상호작용을 하며 놉니다.

엄마가 웃는 얼굴로 아이를 대할 때 Copyright &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copy; 2007 ZERO TO THREE www.zerotothree.org. (Footage from Still Face Experiement.)

그리고 실험을 위해 어머니의 무표정과 무반응이 시작됩니다. 아이는 처음에 의아해 하며 엄마의 관심을 받으려 이런 저런 행동을 해봅니다. 손동작도 해보고 소리도 질러보고 그러다가 마지막엔 아래와 같이 울며 자지러집니다. (시험시간: 1~2분)

엄마가 무표정으로 아이를 대할 때, 일정시간 경과 후 Copyright &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amp;copy; 2007 ZERO TO THREE www.zerotothree.org. (Footage from Still Face Experiement.)


그 외에도 여러 유익한 정보를 배울 수 있었던 다큐멘터리여서 도움이 됐습니다. 육아 중이시거나 육아를 준비하는 예비 부모님들께 추천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조던 피터슨의 책에서 나온 이야기로...)


아이의 공격성에 대한 해석

 

물론 모방능력은 아이가 가진 궁극의 학습수단입니다.
출생 후 본능이 작용하여 엄마 젖을 찾아 먹고 엄마 아빠의 손가락을 꽉 쥐고 엄마 아빠에게 매달립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는 모방능력을 통해 학습합니다. 말을 그렇게 배우고 사물을 가지고 노는 방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에게 인사하는 법도 배우죠.

아직 저희 첫째가 할 줄 아는 단어가 10개가 안될 무렵의 일입니다.
아이에게 밥을 떠 먹이던 숫가락을 아이가 탁 쳐내자 저도 모르게 “야!!”라는 말을 외쳤습니다. 그리고 약 두 달간 아이가 저에게 “야!!” 하는 걸 들어야했죠. (황당해 하는 제 반응을 재밌어 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기억나는 긍정적인 모방의 예도 있죠.
평소에 아내는 겨울에도 춥게 입는 편이라 아내가 거실 바닥에 누워서 자려고 하면 전 담요를 가져와 덮어줍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누워서 쉬려고 하자 아직 말도 잘 못하는 첫째 아이가 쇼파 위에 놓여 있던 담요를 끌고 내려와 아내에게 덮어주는 겁니다. (물론 허접하게…)

그럼 떄리는 건 어떨까요?
어느 순간 마주하게 되는 양육자나 다른 아이를 때리는 장면.
물론, 아이의 성장 단계에 따라 분명 모방으로 학습되는 ‘폭력’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보여준 적도 없는 ‘폭력’이 구현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되는 때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해 조던 피터슨은 어린아이의 공격성운 선천적인 것이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아이는 상대를 때린다. 그 이유는 첫째, 공격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둘째는 공격이 욕망의 충족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공격성이 후천적으로 생기는 것이라는 생각은 틀렸다.
-<인생의 12가지 법칙> 조던 피터슨 -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이 귀여운 존재에게 악한 공격성이라니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공격성’이란 건 양날의 검입니다. 공격성이란 건 본래 자신 혹은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룰 외부 위협으로부터 지켜낼 때 사용되기도 하죠. 다섯살이 된 오빠가 이제 세살이 된 동생이 다른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걸 봤다고 가정합시다. 자기 동생을 괴롭히고 있는 그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동생을 지켜내고자 할 떄 ‘공격성’이 발현됩니다. 이럴 떈 긍정적인 작용을 하죠. 물론 공격성과 보호본능이 동시에 작용했을 때의 이야기겠지만요.

조던 피터슨은 통계를 가져와 이렇게 얘기합니다.

통계를 보면 세살 짜리 아이들이 인간종족 중에서는 가장 폭력적이다.
세살배기 아이들은 발로 차고 주먹을 휘두르고 이로 깨문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기도 한다. 그것은 새로운 영역을 탐험하고 분노와 좌절을 표현하며, 충동적인 욕망을 해소하는 행동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허용되는 행동의 한계를 알아내려는 것이다. 그것 외에 어떤 방법으로 행동의 허용 범위를 알아낼 수 있겠는가.

 

어휘도 논리도 부족한 아이에게 주어진 소통의 수단은 많지 않습니다. 부모들은 아이가 귀여운 눈망울로 눈빛을 통해 소통해주길 원하지만 아이들에게 그런 복잡한 내면연기를 요구한다면 욕심일수 있겠습니다. 저희 아이들의 성장을 통해 본 바로는 제일 먼저 사용되는 건 울음입니다. 주로 소리지르는 게 동반되죠. 좀 더 ‘스킬’이 생기면 우는 척하며 눈물 없이 소리만 지릅니다. 그리고 온 몸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합니다. 팔을 흔들거나 손에 있는 걸 던지거나. 아이가 많이 어릴 때 기다려줘야 하겠지만 언어라는 소통수단을 획득한 후에는 그런 신체언어 대신 말을 사용해야겠죠. 이런 순간에 대해 조더 피터슨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지속적으로 교정해주면 어린아이는 허용되는 공격의 한계를 알게 된다. 교정 조치가 없으면 호기심이 커져서 공격적인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상대를 때리고 물어뜯고 발로 차는 행위가 습관이 된다. 한계라는 신호가 분명하게 주어일 때까지 그런 행동은 계속된다. '내가 엄마를 얼마나 세게 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엄마가 나무랄 때까지 때린다. 교정은 빠를 수록 좋다. 교정은 다른 사람을 때리는 행위가 그다지 효과적인 사회적 전략이 아니라는 걸 깨우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아이들은 스스로 충동을 억제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다. 잘못된 행동을 교정해줘야 충동을 억제하는 법을 배운다. 그래야 여러 충동이 서로 부딪히는 일 없이 아이 마음 속에 자리 잡는다. 사회에에 나가서도 다른 사람들과 충동을 피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마음을 정리하고 체계화 하는 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P.189-190)


혼나면 아이가 울어요.

아이가 흘리는 눈물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인의 모든 눈물이 슬픔의 눈물이 아니듯 아이의 눈물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이걸 알아두면 아이의 눈물에 좀 더 지혜롭게 반응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책에선 잠들기를 거부하는 이웃집 아이를 봐주게 된 사례를 얘기합니다. 이 아이는 자려고 눕히면 부모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거실에 나와 TV를 보다가 늦게 자는 아이였죠. 그리고 피터슨 부부가 이 집 아이들을 봐주기로 한 날, 조던 피터슨이 이 세살바기 아이와 대치하게 된 에피소드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가 우는 가장 흔한 이유는 분노 때문이다.
아이들은 늘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면 부모는 겁을 먹는다. 아이를 울리면 마음에 상처를 입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아이가 우는 가장 흔한 이유는 분노 때문이다. 우는 아이의 안면 근육 움직임을 분석하면 분명히 확인된다. (100) . 화가 나서 우는 아이와 두렵거나 슬퍼서 우는 아이는 안면 근육의 움직임이 전혀 다르다. 표정 뿐 아니라 울음소리도 달라서 어렵지 않게 구분할 수 있다. 분노의 울음은 지배욕을 드러내는 행위다. 그것에 맞게 다루어야 한다. " (P.193)
[원문] Kids do this frequently. Scared parents think that a crying child is always sad or hurt. This is simply not true. Anger is one of the most common reasons for crying. Careful analysis of the musculature patterns of crying children has confirmed this. Anger-crying and fear-or-sadness crying do not look the same. They also don't sound the same, and it can be distinguished with careful attention. Anger-crying is often an act of dominance, and should be dealt with as such.

 

아, 초등학교 고학년떄 까지 화가 나면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던 제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교회 형들과 축구를 하다가 싸움이 났는데 싸움을 말린답시고 나만 붙잡고 상대(형)은 말리지 않아 나만 맞게 된 순간. 아파서 운 게 아닌데 ‘분해서’ 눈물이 났네요. 동생이 잘못해서 싸웠는데 오빠라고 나만 혼날 때… 아, 그 때도 슬퍼서 운 게 아니라 고급어휘로는 ‘억울해서’ 울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감정의 본질은 ‘화’(분노)에 가까운 게 맞았던 것 같네요. 저희 집 둘쨰 아이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뺏겼을 떄, 교회에서 본 장난감을 뺏겼을 떄의 울음. 뺏긴 게 ‘서러워서’ 우는 표정은 좀 더 자란 후에 나타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어릴 수록 뺏김에 대한 감정적 반응은 ‘화’라는 점에 충분히 공감이 갔습니다.


심리학자가 사용한 ‘지배욕’이란 단어에 거부감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아이는 ‘울음’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냅니다. 하면 안되는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원래 갖고 있으면 안 되는 걸 갖고 있게 되고. ‘지배’라는 단어가 주는 무거움을 걷어서 설명해보면 이건 ‘내가 원하는 걸 얻고자 하는 마음’ 정도가 될 수 있겠네요. 아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탐구하는 행위, 그 영토를 ‘정복’한다고 생각해보면 ‘지배욕’이라는 단어가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훈육과 처벌


소위 “전능”하다고 하는 신도 인간에게 ‘규칙과 처벌’이 불필요한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에덴에서도 한 가지 규칙이 있었고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십계명이 주어졌습니다. (그 계명은 그들의 ‘번영’(혹은 행복) 위해서이기도 했죠)
그건 아마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에게 주어진 선택권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원하는 걸 추구할 수 있는 자유.

C.S루이스는 그 자유의지가 신의 도박이라고까지 얘기합니다. 신이 창조한 존재들이 신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하지만 그 권리가 있기 때문에 ‘자발적인 사랑’이 가능해지기도 합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그런 ‘아이의 자유의지’와 마주하는 제 자신을 보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아이, ‘내 뜻대로’ 움직이는 아이였다면 저도 잠도 잘 자고 하고 싶은 일들을 더 많이 했겠죠. 하지만 그런 ‘자아’와 ‘자기 의지’, 선택권이 없는 아이였다면, 그 아이는 정말 ‘인간’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아이가 저에게 안아달라고 했을 때, 그 아이의 바람 속에서 전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에게는 어쩌면 따뜻한 체온 보다는 매끄럽지만 차가운 금속의 ‘피부’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조던 피터슨은 북미 사회를 기준으로 이야기 합니다.

[번역본] 요즘 부모는 훈육과 처벌을 두려워 한다. .....훈육과 처벌에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 둘 다 양육에 꼭 필요하다. (번역본 오역)물론 훈육과 처벌은 신중히 접근해야 할 문제다.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나쁜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체번역] 훈육과 처벌을 사용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적용하거나, 잘 혹은 잘못 적용하느냐의 선택지만 있을 뿐이다.
[원문]Modern parents are terrified of two frequently juxtposed words: discipline and punish. .... Discipline and punish must be handled with care. The fear is unsurprising. But both are neccessary. **They can be applied unconscioulsy or consciously, badly or well, but there is no escaping their use.

<인생의 12가지 법칙> 중, 조던 피터슨


다행히 대한민국에는 오은영 박사님이 계셔서 여러 TV프로그램을 통해 훈육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셨죠. 이번 글은 길이가 이미 너무 길어진 것 같아 다음 글을 통해 조던 피터슨 박사는 어떤 방법을 제시하는 지 설명해보려 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육 경험 있으신 분들의 경험담이나 의견 남겨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육아특집: 2부- 조던 피터슨이 제안 하는 다섯 가지 규칙(feat. 오은영 박사의 10가지 지침)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