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징어게임 속의 '믿음' Belief in the Squid Game
오징어게임의 '믿음'에 관한 드라마이다. 현실과 진실에도 닿아있지만, 가장 큰 테마는 믿음이다.
The biggest theme of Squid Game is 'belief', even though it leads to The reality and The truth.
주인공 기훈을 비롯한 오징어게임에 참가한 모든 이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
Lead character Ki-hoon, as well as the other participants of The Game all has belief. A unprovable belief.
일확천금의 행운이 자신에게 발생할 수 있다는 믿음.
A unprovable fact that winning of the prize can happen to them.
한 번의 반전, 한 번의 반격이 성공하면 지금까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빚이 사라지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 희망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아주 작은 기회.
If this one reversal, one counter-punch succeeds, all the debts that are making them poor will be gone and one can be rich. A very slim chance, that doesn't deserve the name Hope.
어떤 이들에겐 도박으로, 어떤 이들에겐 잘못된 투자라는 형태로 드러나지만, 그 본질엔 부에 대한 추구가 있고, 그 아랜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부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거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For some people, this belief manifested as gambling, for some, as investment gone bad, but at its core, the pursuit of wealth, and underneath, the prepositions that the wealth will provide and guarantee 'happiness', which many of us secretly believe as well.
오징어게임의 참가자들은 인생 속의 일련의 선택으로 수많은 채무가 생겼지만, 이야기의 촛점은 그들의 미련함에 맞춰져있지 않다. 아마 시청자들의 공감이 필요해서였을 거다.
The participants of the Squid Game must have a series of choices that led them to the debts beyond their capacity, the focus of the story is not on their stupidity. That's because the producers needed the sympathy of the viewers.
인생의 중요한 많은 결정들은 다 '도박'이라고 일반화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시대처럼 도박의 보편화가 된 시대는 드물지 않았을까? 부동산, 가상화폐, 주식까지 모두 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도박을 하지 않으면 뒤쳐지는 것 같은 착각이 한국 사회에 팽배하다.
One could make a generalization and argue that all the important decisions in life are a kind of 'gamble', but I wonder if now is the era the 'betting'(or in a sense of gamble) is the most common in the history of human civilization in South Korea. From realestate to cryptocurrency, and stocks, there is a fantasy-level misconception in this society.
'빚'이라는 현실에 기초한 것은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게 공감을 유발할 수 있을 거라고 예측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학자금부터 주택자금을 위한 대출부터 주택담보대출까지.
The purpose lies on the common reality of debts, that many people worldwide are living on debts- from student loan, housing mortgage, to home equity loan.
'절망'을 사유로 목숨을 걸고서라도 '도박'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자기 합리화.
빚이 많은 생명은 죽음보다 못하다-는 생명관(?)
The self-justification that helps one believe 'because of the deseperation, I need to gamble', and the view on life that says 'a life with lots of debts is unworthy, it's worse than death'.
2. 삶의 궁극적 목적 The Ultimate Goal of Life
삶의 궁극적 목적를 몇 개 꼽자면, 최종후보 두 개 중 하나는 생존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행복', '즐거움', '재미'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기쁨'일 것이다.
If we were asked to choose the ultimate purpose of life, the one of the final competing two would be 'survival', then the other would be 'joy' which has different names such as 'happiness', 'pleasure', or 'fun'
오징어게임은 본인의 생존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상황 속에 캐릭터들을 가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이기적인 선택에 합리화를 제시한다. 내가 살기 위해서 죽여도 되는 타인. 타인의 생명보다 소중한 내 목숨.
The Squid Game offers the justification of the most selfish choices that human can made by putting the characters in an extreme circumstance - my survival - if I have to live, I can kill others. My life over other people's lives.
본인의 수많은 선택들이 오징어게임의 참가를 '자원'하게 만들었음에도 그 선택들이 지혜의 결여에 근거한다는 걸 스토리 속의 인물들은 깨달을 새가 없고, 물론 스토리텔러도 그런 (진부한) 메세지를 전하고자 하지 않는다.
Even though it's the personal choices that led the pariticipant to volunteer to join the Game, but the characters in the story doesn't have the luxury to realize their choices are based on the lack of wisdom, and of course, the storyteller doesn't want to express such (old) message.
3. 내가 믿고자 하는 것 - What do we want to believe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선택 중 가장 기본적인 선택 중 하나 - 무엇을 믿을 것인가
The most basic choice we are given among the many is WHAT I will believe.
첫째, 고작 딱지치기로 돈을 줬다는 것으로 쌓인 '작은 신뢰'.
First, a small trust has built up because the other person paid the money by joining the Takji-chigi, a slap-match(?).
그 믿음 하나로 생명을 보장하지 않는 세 가지 규칙 밖에 없는 게임에 참석한다.
(계약서는 상세한 게 더 안전하다)
Because of that belief, the participant joined the game that only has three rules.
(Contracts is better to be specific in writing)
둘째, - 게임주최자가 돈을 지급할 거라는 믿음.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고 증거를 소각시키는 이들이 상금을 지급할 거라는 믿음.
Second, the belief, the founder of the game will pay the prize money - that a person (or a group) who kills casually and gets rid of the evidences by crimation will keep the promise.
셋째, 원하면 멈출 수 있다는 믿음은 첫 번째 참가 후, 돌려보내줄 때 생성된다.
Thirdly, the belief that you can quit whenever you want.
여기서 간과한 것은 민주주의로 착오되는 다수결의 논리는 소수의 권리 (또는 선호)를 포기하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즉, 현실은 게임은 '내가' 원한다고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다.
What's overlooked here is that the decision made by mojority vote menas, the rights (or preferences) of the minority will be abandoned. So, the truth, the reality is it's not a game that 'I can stop' if I want to.
소위 '폰지(Ponzi) 사기' 의 논리이다. 작은 걸 주고 받으며 신뢰를 쌓고, 큰 걸 내놓게 한 후, 뒷통수.
These are the logic of a ponzi scheme. You build the trust by giving and receiving small things, and makes you lay down something big, then the backstab.
한 사람의 최종승자가 선정된 후, 순순히 상금을 지급하는 것보다 좀 더 현실적인 우려는 다음과 같다:
When the final winner was decided, they don't consider the more likely possibilities:
- (1) 상금을 지급한 후, '상금을 지급한다고 했지, 가지고 갈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며 그를 죽인다거나,
Isn't it possible the managers would easily say 'I told you I will give the money, I did't say let you leave with it' - (2) 설령 그에게 일시적으로 그 돈을 지급하더라도 그를 죽일 수도 있고,
even if the money was given, but they still can kill you - (3) 돈을 쓸 수 없는 무인도 섬에 가둬둘 수도 있고,
that the winner could be left alone in the island where nobody can find them - (4) 갑자기 늘어난 은행잔고에 의해 본인이 알지 못하는 범죄에 연루되어 피의자가 될 수 있다
because of the unignorable increase of bank balance, that recipiant of the transfer could be the target of an investigation which would put the winner as a suspect of the crime one has no idea of.
참가자들은 이런 여러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They don't think about these.
그건 절망적인 사람들의 희망 회로일까?
Is that a confirmation bias called 'hope circuit' of the desperate?
그들은 모두 그걸 믿고 싶기 때문에 믿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I can only say they believe it because they want to believe.
자신의 미련함을 보기 보단 '희망이 있는 미래'를 향한 도전이라고.
Rhather than choosing to see one's own stupidity, they renamed it as a challenge towards a future with hope.
가장 안타까운 참여자 새터민 새벽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을 위해 숭고한 노력을 하고 있지만, 자신을 한 번 속인 이에게 다시 한 번 속을 걸 감수한다.
It's the same for the most miserable and pitiful participant, Saebyuk who escaped North Korea. She is doing something noble for her family, but she choose to believe something who once betrayed her again.
4. 진정한 현실 The True Reality
'현실'을 자각하지 못한 미련함에 의해 절박함에 이르른 이들은 또 다시 진정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을 위해 선택을 한다.
Those who reached the desperate situation because of their inability to see the 'reality', again failed to see the true reality, most of the people make the choice for the most basic purpose, survivable.
참가자들은 부가 본인의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고 믿고 리스크 (위험, 손실)를 마주할 때, 안전보다 도전 (혹은 도박)을 해왔다. 그리고 삶의 목적이 부의 축적이 되면서 인간으로서의 방향성을 잃은 이들은 그 게임의 참여를 자발할 수 밖에 없었다고 믿게 만든다.
When they face the risk (danger or loss), those participants had been gambling (or challenging) because they believed the wealth would solve their problems.
이야기의 끝에서 진정한 현실이 드러난다. (이하 잠시 스포포함. 접은글 처리)
And the true reality, the turth reveals in the end of the narrative. (spoiler alert. click below to read this part)
↓↓regarding the ending↓↓
부를 얻은 기훈은 돌이킬 수 없는 '어머니와의 시간'을 잃었고, 막대한 부를 얻었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마주했으며, 그 과정에서 겪은 수많은 죽음 역시 그가 부가 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행복을 얻는 것을 방해했을 것이다.
Ki-hun, the final winner of the Game, lost the irreversable time with his mother. He faced the death which no amount of wealth can undo. And those death he faced on his ways to victory must have hindered him getting his happiness which he firmly believed the wealth could bring.
기훈은 게임 창시자를 만난 후, 막대한 부를 얻으며 '즐거움'을 잃었기에 어린 시절의 '재미'를 되찾기 위해 게임이 시작됐다는 배경을 알게 된다.
And he learned that the game started because of the inventor of the game lost his 'fun' after accumulating the enormous wealth, and wanted to taste that fun again.
5. 우리가 던져봐야 하는 질문 The questions we have to ask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감히 어떤 내러티브가 어떤 명확한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쓰여진다면 그 스토리는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징어게임이라는 내러티브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하는 것은 있다. 아니, 우리가 질문해봐야 하는 게 있다.
In the days of post-modernism, no story may be chosen and loved by the public if a storyteller wants to give a specific moral teaching . But even so, there are things we should learn from the Squid Game. There's something we want to ask ourselves.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과연 현실인가?
Is what we believe really the reality?
- 단순히 경제적으로 유지가능한가- 정도의 의미만 가진 '현실'이 아닌, 이 세상의 '진리'를 내포한 '궁극적 현실'인가?
Not in the sense of 'economically possible' reality, but the ultimate reality, which entails the truth of the world? - 돈이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
Would money make me happy? - 돈은 단순히 나에게 사용되기만 할 도구로 남아 있을 수 있는 존재인가?
Is the nature of money, essentially just a tool that will tamely being used by me ? - 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돈의 영향력에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Can people be free from the influence of the money if you have more of it? - 돈을 얻기 위한 댓가 중, 어떤 게 돈보다 소중한가?
What is more valueable than the money among the expanses you have to pay in order to earn the money?
상위 1%는 말 그대로 소수이다. 그리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이들만 알 수 있다는 그 공허함.
The top 1%, is literally a minority. And there's a void that only the people on top could experience.
비록 일부는 '삶의 의미'를 위해 인류애에 눈을 뜨기도 하지만 .....
Even though some opened up their eyes for the love for humanity - to gain the meaning of life....
대중의 시선에서 봤을 때 최고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술, 약물중독, 성중독, 우울증 등으로 생애를 마감하는 이들 (그게 사회적 생명이든, 생물학적 생명이든)은 종종, 그들의 소식은 심심치 않게 우리의 귀에 들린다.
we hear the cases of people ending their life (wether is it's physical death or social death), through substance-abuse, sex addictions, depressions.
만약 부동산이 유일한 '계층이동'의 수단이라고 믿는다면 그 성공여부를 떠나서 일단 계층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아야 하고,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건 그게 사회 속에서 정당화 될 수 있도록 허용하는데 일조하는 게 된다.
If you believe buying a potential realestate is the only option to move up to the 'upper class' in social ladders, before we can talk about the existence of the social hierachy, you are admitting and accepting it, and you are allowing it even helping it.
집값이 오르는 게 무서웠던 사람들도, 집을 사게 되면 집값이 올라야 희망이 생기게 되는 아이러니.
The irony that the people who were scared of housing price rising, suddenly put their hope on the rocketting housing price as soon as they purchased a house.
그 오른 집값 때문에 절망하게 되는 그 다음 세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의 생존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번영'까지) '은 모든 걸 합리화 할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에.
The next generations become desperate because of that unafforadable housing price is out of the picture for the homeowners. Because my survival (or floushing) is something that can justify everything.
한편 이 흐름의 잘못을 선택권이 있는 당사자들의 욕심은 간과한채, 정책과 정부라고 책임을 전가한다.
And for this kind of current, the public blames the government and its policy, instead of the individual decision makers who had the choices, and overlooks the greed of some realestate owners.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노후보장 수단을 위해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은 국가 단위에서는 감소하는 인구추세로 미래에 대한 걱정을 낳게 한다.
And ironically, the choice they make is for their security after the retirement when they gets too old, it leads to the plumming population that gives birth to the worries for the future.
이렇게 문제가 문제를 낳게 하는 건, 사람들이 선택하는 해결논리가 궁극적 현실에 바탕해서 발생한 게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
If a solution of a problem keep giving another problem, isn't it possible that their logic for the resolution is not based on the ultimate reality?
소위 진리에 근거하지 않고 피상적인 현상에 대한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 때문은 아닐까?
That they are putting their effort no based on so-called 'truth', but only working on the phenomena on superfical levels?
무엇을 추구하는 가?
What do you pursue?
그게 인간의 존재가치를 정의한다고 한다.
Some say it defines the value of one's existence.
그게 돈, 명예, 사랑, 재미, 자식의 성공, 사업의 성공 등 그 어떤 게 됐든, 그걸 위해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건, 그걸 잃게 됐을 때, '자아'를 잃어버릴 수 있기도 하다.
Money, honor, love, fun, the success of your child, or the success of the business, whatever it is, if you will do anyhting for that, it means it's the thing that will make you lose your self.
그걸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걸 믿고 싶기 때문에' ' 그걸 믿는' 순환논리의 오류 속에서 평생 쳇바퀴처럼 살다 지쳐 게임오버 될지도 모른다.
If we don't realize that, we may just be eliminated in the unending cycle of circular reasoning, 'because we want to believe so'.
6. 오징어게임이 가르쳐준 것 What the Squid Game taught me
오징어게임이 내게 보여준 건 이렇다.
What the Squid Game revealed about human society to me is these.
무엇을 믿는가-는 인간의 삶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
That What you believe can determine one's course of life.
그리고 나를 현미경 위해 올려놓고 보지 않는다면 나의 방향성을 볼 수 없다는 것.
And if I don't put myself on the microscope, I wouldn't be able to know my directions.
그 방향성의 확인을 위해서는 내 선호도로 결정되는 선과 악이 아니라, 나를 초월한 절대적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
To know the direction, I need an absolute standard that is beyond and above me.
또 내가 나를 관찰하기 위해선, 내가 아닌 제3자, 절대자의 시선으로 날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And in order to observe myself, I need to see myself from the eyes of the third person, a ultimate being.
7. 오징어게임 속의 개독교 The Pseudo-Christianity described in Squid Game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기독교는 주로 조롱의 대상이 된다.
It is now almost a cliche how Christianity is misrepresented in the mass media and culture of this century.
넓은 스펙트럼의 구성원 중에서 가장 왜곡된 모습을 피상적으로 그려낸다.
Even though there are a wide spectrum of people, they depict the most distorted superficially.
마치 입에서 '주님'을 부르고, '기도'를 중얼대면 그게 기독교인인 것처럼.
As if if someone say the word 'Lord', and mumble a 'prayer', that means one is indeed a Christian.
지난 한 달간 넷플릭스에서 시청한 콘텐츠 30 여개 중, 단 하나의 프로그램만이 기독교 가치관을 살아가는 기독교인을 묘사했다. (블라인드 사이드)
There were over thirty contents I watched on Netflix, only one movie choose to use a character who actually live the Christian value - The Blind Side.
그리고 기독교의 진정한 가르침을 모르는 이들은 다른 29개의 콘텐츠에서 묘사된 것이 기독교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And for those who are not familiar with what Christianity truly teaches, mistake what they see on the screen as Christianity, from the other 29 contents.
그렇게 기독교와 무관한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인상과 시선이 생기고, 그런 시선으로 본인과 타인의 경험을 통해 부정적인 시선을 공고하게 한다.
From a pop culture content that is actually irrelevant with Christianity, people build their impression of Christianity and the view, by sharing that view others who also had bad experience with Christianity, the negative view becomes firm.
애당초 기독교는 '선인'들의 종교가 아니라, '죄인들의 종교', 죄인들을 위한 종교이다. (물론 '종교'의 정의를 좀 더 세부화 하면 기독교는 종교의 속성을 거부하는 특징들이 있어,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건 다른 글에서 설명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착한 사람들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큰 착오이다. 인간들이 집단이 되면 확률적으로 그 중엔 악인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입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매주 일요일 교회를 다니고, 헌금을 낸다고 그 사람이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다.
To be fair, Christianity was never a religion for the 'good people'. It's a religion for the sinners. (Of course, if you clarify the definition of religion, Christianity lacks core aspects of religions, so some can argue that it is not a religion, but that's a different matter for different time) So, if you think the church will be full of good people, that's a big mistake. If a group of people gathers, probability would tell you that evil people exists in that group. It doesn't mean one is a Christian who can and should represent Christianity because someone claims they believe in God, go to church every Sunday, or give money to the church.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은 성경 안에서 찾아야하고, 그 대표인물은 예수이다.
The person represents Christianity should be found in the Bible, and the representative should be Jesus.
성경의 존재 이유는 예수를 위해서이고, 예수가 아닌 다른 인물을 기준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면 분명 인간이 왜곡하기 쉬운 해석으로 대충 만들어진 정의를 내릴 수 있다.
The whole Bible exists for Jesus, and if you explain Christianity using someone other than him, it can be defined with an half-ass explanation so easy to be distorted.
국가로서의 이스라엘 민족만 보고 기독교를 말하면 정치적 논리로 전쟁의 정당화 논리로 사용되고,
(이스라엘 vs 팔레스틴)
For example, if you focus on the Israelites and talk about Christianity, under the logic of politics, it could be ( and had been) used as the reasoning for justification of wars.
성경의 인물 하나를 롤모델로 삼으면 자기의 죄를 타인에게 정당화 시킬 때 사용되기 쉽다.
(아브라함, 다윗, 기드온 등..)
If you pick a role model from a biblical character, it can be used as something to justify one's sin to other people. (Abraham, David, Gideon, etc)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야 된다는 허무맹랑한 의견은 말도 안된다.
It is an absurd claim if someone says Christianity should be the religion of a whole nation.
기독교는 강요하는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Christianity should never be a religion that enforces nor forces.
그렇게 기독교가 권력의 탈을 쓰고, '국교'라는 이름을 쓰게 됐던 역사적 순간이 기독교 타락의 시작이었고, 기독교가 '국교'인 나라들의 역사적 사건들은 단 하나도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When Christianity wears the mask of authority and power, and wore the name of 'state religion', that was the point Christianity start to fall. If you look at the history of those countries who bore state religion as Christianity, non of those historical events would help explain the truth of Christianity.
당신이 기독교인이라면 단 한 가지 상상을 제시해보고 싶다.
If you are a Christian, I'd like you to imagine one thing.
대한민국, 아니, 서울 시민의 50%가 신약시대의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살아간다면, 그렇게 살아왔더라면,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이름을 '개독교'로 불렀을까.
If 50% of Korean population, no, 50% of Seoul citizen, lived as the early Christians in the New Testament period, would people call Christianity with that distorted name, 'Gae-dog-gyo'- meaning something like Dog-like (meaning bad in this culture. Sorry, dogs.) religion'
아니, 자칭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의 50%만이라도 사회 속에서 초대교회 교인들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갔더라면 어땠을까?
Or if 50% self-claimed Christians actually lived the values of early Church members in this society?
아무리 대중매체에서 기독교가 왜곡되게 그려진다해도,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지금처럼 퍼졌을까?
Even if the mass media and pop culture distorted Christianity, would that misunderstanding have been so widely spread?
인간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엔 두 가지 시선이 있다고 들었던 게 기억난다.
I remember there are two kind of views you can choose when you look at the human society.
나를 가해자의 일원으로 보는 시선과 나를 피해자 또는 방관자로 보는 나를 가해자로 보지 않는 시선.
One is to see oneself as a member of the perpetrator (a sinner), the other is to exclude oneself from the perpetrator and see oneself as a victim or a bystander.
인간 세상의 역사 속에서 나를 죄인의 반열에서 제외하고 그들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살아가거나,
똑같은 죄인으로서 혹은 잠재적 가해자로서 자신을 죄인의 자리에 놓고 살아가거나.
To see the world of human history, and live, by excluding myself from the sinners, in the seat of the critique; or put myself as a same kind of sinner or a potential perpetrator.
혹시 영화나 드라마, 뉴스에서 본 기독교인을 보고 '기독교는 저런 거구나' 생각한다면 그건 마치 '뷰티풀 마인드'라는 영화를 보고 경제학이론의 '게임이론'을 배우려고 하는 것 정도의 괴리감이 있는 판단오류이다. (혹은 좀 더 최근 비유를 들자면, '쿠로코의 농구'를 보고 농구를 배우려고 하는 것 정도이다.)
If anyone thinks that 'oh, that's what Christianity' by watching the movies and TV shows, or news even, I'd have to say it's like trying to learn Game Theory (Economy Theory) by watching the movie A Beautiful Mind (2001, starring Russell Crowe); Or to use a more recent analogy, it's like trying to learn how to play basketball by watching Kuroko's Basketball.
개독교와 기독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There is a big difference between a Pseudo-Chirstianity and True Christianity.
뉴스, 영화, 드라마 등 스크린을 통해 당신이 알게 된 '기독교'가 진짜 기독교인지 검증해보는 게 어떨까?
How about crosschecking the stuff you heard and seen on the screen from the news, movies, and TV shows are indeed what real Christians believe?
기독교가 허구라는 걸 입증하기 위한 목적이라도 좋다. (그게 객관성을 잃게한다는 것은 인지한 상태로 말이다)
It's okay if your purpose is to disprove Christianity (though you should acknowled that woud may make you biased)
성경을 마주하고 그 속의 예수를 찾아보고 역사 속의 이스라엘과 역사 속의 예수를 조사해보는 게 어쩌면 어린 시절 친구 손 따라 갔던 교회에서 들은 기독교보다 공부가 될 수도 있다.
If you face the Bible and look for Jesus, and investigate the Israel in history, and Jesus in the history, you may learn a lot more about Christianity than the time you went along with your friend to a Church.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 알아보고 싶다면, 다음 글을 전환점으로 추천합니다.
If you'd like to find out whether you have misunderstandings about Christianity, I hope you could give a try to the following article. Thank you.
스스로를 어느 교회 교인이라고 부르는 분께서 이 글을 읽고 계시다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들이 정말 성경 전반적에서 가르치는 것인지, 아니면 목사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성경을 입맛대로 인용하는 것에 불과한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
If there's a church member who's reading this, you may use this chance to check if what the Church teaches is indeed what the whole Bible teaches, or your pastor is quoting the Bible as he fits under the influence of his political conviction.
'무조건 믿으면 돼' 라는 말로 붙잡지 못한 친족 혹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마주할 지도 모릅겠다. 그러길 바란다.
You may find a story that would help the family and friends you couldn't keep by saying 'you should just believe'. I hope so.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에게도 오징어게임과 같이 여러 문화 매체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쌓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오해를 풀어보고 싶으시다면 다음 글을 추천드립니다.
본인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비과학적인 미신을 갖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과학적 사고가 아닌 '과학주의'라는 사상체계의 편견에 영향을 받으신 걸 수도 있습니다.
현대과학의 아버지들로 부를 수 있는 뉴턴(Issac Newton), 맥스웰(James Maxwell), 패러데이(Michael Faraday), 보일(Robert Boyle), 달튼(John Dalton)부터 아노 펜지어스(Arno Penzias) 와 같은 노벨상 과학분야 수상자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걸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런 분들에겐 옥스포드 수학자 존 레녹스 교수의 강의를 번역한 다음 글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MIT 핵융합 교수 이안 허친슨의 강의를 번역한 글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저보다 훨씬 깊이 분석한 기사를 발견하게 되어 추가 합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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