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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의 기독교

넷플릭스 <지옥> (연상호 作) Vs.기독교의 지옥: 세계관 비교

0. 예술, 미디어 소재로서의 소비되는 종교적 세계관 요소 


단테의 <신곡:지옥>,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때부터 연상호 감독의 <지옥>까지 문화예술매체는종교세계관을 참고해왔다. 그리고 때로는 종교경전에서 명확히 하지 않은 영역의 빈칸을 상상으로 채우거나 유물론적 혹은 반종교적인 시선으로 종교를 해체하려는 시도를 한다. 종교의 이런 저런 요소와 키워드를 가지고 작품의 세계관을 구축하는 게 현대영상매체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 - Last Judgment , Sistine Chapel, altar wall, fresco, 1534-1541 (Vatican City, Rome) Ramon Stoppelenburg CC BY-NC-SA 2.0)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이 묘사한 신과 기독교의 신을 포함하여 두 세계관에 대한 진지한 비교를 해보려한다. 연상호님의 <지옥>은 피상적인 관찰과 깊은 고민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서 키워드를 뽑아낸다.

 

  • 정의란 무엇인가?
  • 이 존재한다면 왜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가?
  • 죽음은 심판인가?
  • 신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는가?
  • 신의 뜻, 신의 의도는 무엇인가?
  • 왜 신은 무고한 사람들에게도 죽음을 선사하는가?


1. <지옥>이 묘사한 신, 정의, 종교


<지옥>의 세계관에서는 “신의 사자”로 해석되는 괴물들은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다. 그들은 주로 호리호리한 전통적 저승사자와 영미권의 reaper와 대조되는 어벤져스의 타노스 급의 우람함을 지닌 혼종 존재이다. 작품 내에서 “심판으로서의 죽음”을 표현 하기 위한 심볼이었을지 모르겠다.

여느 저승사자처럼 곱게 데려가지 않고 물리적으로 폭행을 가하는 &amp;amp;amp;amp;amp;amp;lt;지옥&amp;amp;amp;amp;amp;amp;gt;의 '사자'


<지옥> 속에서 그린 신은 초자연적인 폭력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다. 예언은 사망예고에 불과하고 심판은 피 튀기는 폭력 후의 고열처리를 통한 급속화장이다.

그리고 어느 사이비종교단체가 그렇듯 드러난 한 가지(계시)를 가지고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해석한다. 해석의 독점권을 권력으로 사용하게 되는 순간, 그 “종교”는 신의 의지 대신 다시 인간의 통제수단으로 변모된다.

<지옥>은 두려움이 가장 효율적인 통제 수단이라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적 관점에서 신의 통제를 설명하려한다. 외부에서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으로서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 역시 지옥에 가기 싫어서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자발적인 선택에 중점을 두고 신이 예수를 통해 인류에게 제시한 해결책을 설명하며 인간의 자유의지에 기반한 '순종'을 요구한다. 


2. 신의 의도: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


제법 그럴싸한 해석이긴 하지만 여기엔 모순이 숨어있다. <지옥>은 선과 악의 개념에서 선하게 살아가는 것 대신, 도덕이라는 인간사회의 규율로 신이 규정하는 선을 대체한다. 그리고 동기와 무관하게 결과론적으로 도덕적으로 살면 된다는 해석을 제공한다. (기독교에서의 신은 인간의 동기도 중시한다. )

신의 심판이 두려워서 선하게 사는 것이라면 그건 <지옥>에서 해석하는 것처럼 공포를 통한 도덕성 유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기독교에서 신은 ‘경외敬畏의 대상’이라고 표현한다. 영어 성경에는 두려움을 뜻하는 fear라는 단어로 번역되긴 하지만 히브리어를 살펴보면 한자어인 경외라는 단어가 더 이 대상에 대한 합당한 태도를 잘 살명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은 그저 공포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위대하고 선한 존재로서 “존경”하고 그 앞에 마주할 때 경이로움이 느껴지는(in awe) 대상이다. 그리고 단순히 정의를 지키는 선의 수호자이자 심판자일뿐만 아니라 인류를 “사랑”하는 존재로 기록되어있다.

한 인간의 입체적인 현실을 왜곡하는 방법 중 하나는 단편적인 부분만 묘사하거나 그 부분만 강조하여 부각시키는 방법이 있다. 사랑이 없는 정의의 심판자로서 묘사된 신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과는 거리가 멀다.

3. 새진리회의 "죄" vs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


극 중 새진리회가 말하는 죄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와 다르다. 일단 죄를 논하려면 어떤 기준, 어떤 법을 기준으로 판단해야하는지를 먼저 생각해봐야한다. 어떤 걸 지켜야하는 지 조차 알려주지 않고 그걸 지키지 않는다고 처벌하는 신이 공정한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세간에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기독교는 어떤 규율들을 지키면 천국에 가고 그걸 어기면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 구약성서 시점에 살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명시적으로 주어진 십계명, 그 외에도 자잘한 율법이란 게 주어졌다. 지금 우리로서는 잘 이해 못할 풍습과 절차 등도 있었다. 그리고 개신교에서 믿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약 시대에서부터 예언 되어 온 한 사람(이자 신)이 오면서 그 율법이 “완성” 되었다고 표현한다.

(얉은 독해력으로 성경의 일부만 발췌해서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 하여 적용한다는 주장을 할 때 쓰이는 이 율법. 하지만 성경 전체를 읽다보면 예수 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가르침 역시 적혀 있기 때문에 그 주장은 무색해진다. )


새진리회의 기준을 적용시키자면 그들은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십계명의 반쪽만을 차용한 반쪽짜리 종교를 창시한다. 신에 대한 구체적 설명 없이 도덕만 강요하고 용서와 구원은 부재한 종교가 극중에서 그렇게 탄생한다.


기독교 밖에서 바라봤을 땐 그렇게 황당한 “회개와 용서”의 개념은 역사적 현실에서 절망 속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며 새 삶을 선물해왔다.

(물론 영화 <밀양>에서 같이 “회개”와 “믿는다” 라는 단어의 1차원적 해석으로 조롱받아 마땅한 “가짜 기독교인”이 대중적 인식에 자리 잡혀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회개는 당연히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도의 진정성과 변화가 수반된다. 그저 입으로만 회개했다고, 구원받았다고 한다면 그런 가식적이고 피상적인 위선은 당연히 자기기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


이런 회개와 용서, 그리고 그 후의 기회의 개념은 서양 법체계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죄를 저지르면 그 댓가를 치루는 권선징악의 개념은 동양 곳곳의 설화 속에 숨어있지다. 죄인은 9족을 멸한다는 동양의 무서운 처벌과 대조적으로 범죄 후에도 새로운 기회를 주기 위한 교화시설로서의 감옥 개념, 범죄자에게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권리, 죄인에게도 박탈되지 않는 인권의 개념의 시작을 기독교를 기원으로 해석하는 법 역사학자들도 있다.

물론 신이 어떤 죄도 용서할 수 있다는 명제를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죄의 기준이 무엇인지, 그 기준을 정하는 것이 누구인지에 대한 납득이 선제되어야 한다. 그런 전제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인간의 기준인 도덕을 잣대로 삼으면 당연히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기독교의 일부 내용이 상식을 초월한다고 할 수 있지만 잘 살펴보면 상식에 어긋나는 것과는 성격이 다른 문제이다.


 

많은 일반대중의 단순화된 이해와 달리, 깊이 있게 생각해봤을 때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몇 개의 정해진 목록에서 하면 안되는 일을 하는 것” 이 아니다. 그 목록은 인간 사회의 법처럼 그 항목에 부합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처벌을 받기 위해서 존재하다기보다는 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 거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예수는 십계명을 두 가지로 분류해서 요약했다: 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지옥>에서의 알 수 없는 “신”과 달리, 그럼 일단 기독교의 신은 뭘 원하는 지가 가늠이 가능하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이 설명한 죄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보면 본질적으로 다른 시선을 배울 수 있다.

Sin is building your identity on anything but God.

죄: 신이 아닌 다른 것 위에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

Søren Kierkegaard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을 가장 잘 아는 것은 그 창조주일 거다. 신을 사랑하라는 얘기를 좀 더 풀어서 설명하려면 먼저 우리 인간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정체성을 기반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추구할 때 우리는 행복과 멀어질 수 밖에 없다. 성 어거스틴은 그걸 신만이 채울 수 있는 구멍 “God-shaped hole”이란 표현으로 설명하려 했었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신을 사랑하라는 것은 어찌보면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행복을 위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기본 지식이 아닐까?

예를 들자면 돈을 사랑하는 사람의 정체성은 그의 부, 혹은 그 부에서 오는 권력에 기반한다. 그리고 그 부를 추구하는 데 모든 시간과 노력을 퍼부을 것이고 그 부가 상실되는 순간 자신의 가치, 삶의 의미를 잃을 거다. 그리고 그 부가 자신에게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공허함 역시 그가 행복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부가 아닌 명예나 권력, 연인 혹은 자식 모두가 그런 정체성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이것들이 나쁜 거라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들을 신과 동급으로 “숭배”하게 될 경우, 그게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죄”의 근간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건 개인이 아닌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서로의 행복을 침해하지 않기 위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4. <지옥>의 신: 단서의 부재


<지옥>의 신과 달리 기독교의 신은 역사 속 인간의 기록을 통해 그 메시지를 보존해왔다.

 

초기 기독교 발생 당시 기록한 사본들 - 예수 사건 이후 70-90년의 사본과 300년 이후의 사본의 차이가 '거의' 없다. (사본들 중 오기 오류 등은 있으나 의미를 훼손하는 경우는 없다시피 하다


원본이 없는 게 문제가 되지 않을 분더러 오히려 원본의 부제가 특정 집단이 원본을 확보하여 변조, 날조를 할 수 없도록 수많은 사본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파생되어 원본 메시지의 훼손을 예방해왔다. 지금 개념으로 말하면 아날로그적 블록체인의 효과를 가지고 있게 된다. 다빈치코드와 같이 대중문화에서 믿는 한 조직이 성경을 관리 통제한다는 건 불가능했으며 음모론 수준의 역사적 근거가 뒷받침 되지 않은 상상에 불과하다.

바울서신, 복음서가 퍼져가는 상황 - Slide from Debate 'Does the Bible Misquote Jesus?' of James R. White


물론 고대근동과 그리스로마의 각 시대별 문화권과 언어, 그리고 다양한 시기의 언어적 변화와 번역본이 해석의 스펙트럼을 존재하게 하기는 하지만 깊이 파보면 원래 의미와 가깝게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5. 신의 실수? 신의 한수!


<지옥>에서 묘사된 ‘신으로 오해 받은 초자연적 존재’와는 달리 기독교의 신은 실수하지 않는다. 인간의 실수와 악행 모두 사용하여 궁극적 선을 이룬다. 그게 성경에서 묘사된 신이다.

성경에 기록된 많은 불완전한 인간들과 그들의 선택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탄생한다. 순수혈통의 왕족이 아니라 고대근동 지방은 물론 아시아에서도 당연시 되던 장자를 통해서가 아닌 동생에게, 실수 없는 왕이 아닌 간음하고 살인을 저지른 왕의 혈통에서, 더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인의 족보가 아닌 선택 받지 못한 여인의 혈통에서 예수가 탄생한다.
마찬가지로 한 번도 흔들림 없이 예수를 믿은 제자가 아닌 위기의 순간에 예수를 부정한 베드로와 의심이 많은 도마를 사용한다.

요셉의 형들의 악행을 저질러도 그렇게 팔려간 상황에서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히브리 민족을 구하는 가 하면, 이집트 탈출을 이끄는 민족의 리더 모세는 영아 때 유기 되고 입양되고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간 인물이다.

성경에 묘사된 인물들을 보면 대부분 여느 영웅담과는 달리 인물의 성공담이 인간의 실패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죄와 실수가 가득한 구약성경의 내러티브 안에서 신은 그 모든 걸 사용하여 인류의 구원을 위해 '움직인다' 고 성경은 가르친다. 즉 인간은 실수해도 신은 실수하지 않는다. 

 

6.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 


본격적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에 대해 얘기하려면 성경에서 지옥에 대한 묘사를 확실히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일반인들의 오해

 

일반대중의 인식, 그리고 어쩌면 다수의 기독교 평신도들이 가지고 있는 지옥에 대한 인식은 의외로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기 보다는 성경을 소재로 사용한 예술품 (시스틴 채플의 벽화) 이나 그리스로마신화(하데스) 등의 영향을 받은 지옥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

잘못된 개념의 예:
- 지옥은 악마/사탄이 다스린다.
- 지옥은 악마가 죄인들을 고문하는 곳이다.
- 신이 인간을 위해서 지옥을 만들었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의 근본인 성경을 세밀히 살펴보면 성경적인 지옥관은 위에 묘사된 것들과 다르다.

 

Compelled: Speaking and Living the Gospel - Tim Mackie (The Bible Project) 출처 : Tim Mackie Archives

 

여기에 대해선 별도의 시리즈를 진행해야 충분한 설명이 가능할 것 같으니 이번 글에선 기존 관점과의 차이를 부각한 요약본만 설명하는 것으로 갈음해야겠다. 기독교 밖의 많은 사람 (그리고 일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세계관의 천국과 지옥을 '전통적인 관점'의 사후 세계로서만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성경적인 관점을 보면 이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전통적 관점 vs. 성경적 관점 - Exploring My Strange Bible - with Tim Mackie

 

※필자는 신학자도 신학생도 아닌 일반인으로서 전문가들의 의견에 기대어 이 부분에 대해 설명한다.

참고대상: 팀 켈러(Tim Keller) 목사 (D.Min) 설교, <바이블 프로젝트>의 창립자 팀 맥키(Tim Mackie) 목사(Ph.d)의 설교

 


팀 켈러 목사는 “지옥의 불”이라는 건 아마 비유일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 불보다 더 고통스러운 어떤 것의. 그리고 예수님의 비유와 그 확장판 격인 C.S 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위대한 이혼>를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에 대해 설명한다.

 

누가복음의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우선 성경 내 가장 권위 있는 인물인 예수가 사용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살펴보며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 누가복음 16:19-31 (본문 : 접은글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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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나사로

19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1)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기며 호화스럽게 살았다.

20 한편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부스럼투성이의 거지가 누워 있었다.

21 그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 하자 심지어 개들까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22 어느 날 거지가 죽어 천사들의 인도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도 죽어 땅에 묻혔다.

23 부자가 [2]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중에 쳐다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나사로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24 그래서 그는 큰 소리로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 손가락 끝으로 물을 찍어다가 내 혀를 시원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부르짖었다.

25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생각해 보아라. 너는 살아 있을 때 좋은 것을 마음껏 누렸고 나사로는 온갖 괴로움만 겪었다. 하지만 지금 나사로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다.

26 이뿐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 싶은 사람도 건너갈 수 없고 거기서도 우리에게 건너올 수 없도록 되어 있다.’

27 그러자 부자는 ‘제발 부탁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 주십시오.

28 내 형제가 다섯인데 나사로를 보내 그들에게 경고하여 내 형제들만이라도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29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30 그때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가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31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비록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1) 16:19 원문에는 ‘자색옷과고운베옷’

(2) 16:23 헬라어 ‘하데스’

 

19 “Now there was a rich man, and he habitually dressed in purple and fine linen, enjoying himself in splendor every day. 20 And a poor man named Lazarus was laid at his gate, covered with sores, 21 and longing to be fed from the scraps which fell from the rich man’s table; not only that, the dogs also were coming and licking his sores. 22 Now it happened that the poor man died and was carried away by the angels to [u]Abraham’s arms; and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23 And in Hades he raised his eyes, being in torment, and *saw Abraham far away and Lazarus in his [v]arms. 24 And he cried out and said, ‘Father Abraham, have mercy on me and send Lazarus, so that he may dip the tip of his finger in water and cool off my tongue, for I am in agony in this flame.’ 25 But Abraham said, ‘Child, remember that during your life you received your good things, and likewise Lazarus bad things; but now he is being comforted here, and you are in agony. 26 And [w]besides all this, between us and you a great chasm has been set, so that those who want to go over from here to you will not be able, nor will any people cross over from there to us.’ 27 And he said, ‘Then I request of you, father, that you send him to my father’s house— 28 for I have five brothers—in order that he may warn them, so that they will not come to this place of torment as well.’ 29 But Abraham *said, ‘They have [x]Moses and the Prophets; let them hear them.’ 30 But he said, ‘No, father Abraham, but if someone goes to them from the dead, they will repent!’ 31 But he said to him, ‘If they do no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they will not be persuaded even if someone rises from the dead.’”


우선 이건 비유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다.


부자는 이름이 없고 나사로는 이름이 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정체성의 부재로 해석한다. 부자는 그의 부가 정체성이고, 나사로는 거지이지만 이름을 가지고 있다.

부자는 지옥에서 꺼내달라고 하지 않는다.
거지 나사로를 아직도 자기 하인인 것처럼 심부름 시키려 한다.
자기 형제들은 이 곳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부탁을 하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자신에게 충분한 사전정보가 없었다는 불평으로도 해석된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보면 다들 믿을거라고 주장하지만 과거의 선례를 들며 성서에 기록된 걸 믿지 않으면 선지자도 믿지 않을 거라며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보여준 패턴을 지적받는다.

바이블 프로젝트의 팀 맥키 목사도 같은 해석을 한다. 이 비유에서 사용된 지옥으로 번역된 단어의 원어인 “게헤나" 는 'Valley of [the sons of] Hinnom' 이란 히브리어의 그리스어 번역이자 실제 이스라엘 지명이며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숭배를 하며 아이를 제물로 바치던 곳*이자 쓰레기를 불태우는 소각장으로서의 장소 였다고 한다. (참고 영상)

* 참고: 열왕기하 28:3;33:6; 예레미아서 7:31;19:2-6; 이사야서 30:33 

 

What is Gehenna? | GotQuestions.org

What is Gehenna? What is the origin of the word Gehenna? How did Gehenna come to be used to refer to hell?

www.gotquestions.org

 

또 예수의 비유 외에도 성경에 나온 지옥에 대한 묘사가 “문자적”이 아닌 비유적이라는 것에 대한 근거를 제시한다. (예: 타오르는 불과 칠흑같은 어둠이 공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이 있으면 밝아진다) 특히 요한계시록이란 책은 너무 특이한 문학장르이기 때문에 그 해석이 더 어렵다는 점에도 주의를 상기시킨다.

실제로 다른 자료를 봤을 때, “지옥”으로 번역된 원어는 여러 개가 있는데, 구약의 시편을 기준으로 하면 “스올”은 성경 곳곳에서 지옥, 무덤, 다른 단어로 번역된다.

두 명의 팀 목사 모두 CS루이스를 인용하며 이렇게 제안한다.
이기심, 욕심, 불평하는 마음 같은 우리의 단점들은 100년이 안되는 짧은 삶을 살 때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지만,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점진적으로 악화되는 그 단점은 결국 그 사람의 일부가 아닌 전부가 되어버리고 그렇게 그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될 거라는 거다.

즉, 하나님이 정체성의 근본이 아닌 내 스스로가 정체성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스스로가 지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지옥은 신으로부터 영원히 떨어진 상태를 말한다.

그게 왜 “지옥”이 되는 지 이해하려면 기독교 세계관에서 우리 인간은 원하든 원치 않든 기본적으로 모두 신이 제공하는 “모두에게 제공되는 보편적 은혜”를 받고 살아간다고 한다. “일반은총”이라는 용어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 개념은 인간이 누리고 있는 모든 선하고 좋은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전제로 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만 햇빛과 비를 주고 지혜와 건강을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 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상태가 된다면 그 사람에겐 자기만 남고 self-absorbed한 인간의 궁극적인 모습으로 만족 없는 갈증만 남게 된다고 상상해볼 수 있겠다.

그렇게 사후세계로서 시작되는 장소만이 아닌 살아있을 때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으며 지금도 존재하는 “연속성 있는 악화”로서의 지옥의 개념이 완성된다.

 

이런 해석은 만장일치의 관점이 아니지만, 팀 맥키 목사는 말한다. 성경에서 천국과 지옥을 대조되는 개념으로 같은 한 문장에서 나열되는 구절은 없다고.

창세기를 짚어보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천국과 지옥을 창조했다는 말은 없다.

He created heaven(s) and earth.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라는 주기도문에도 힌트는 있다.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그러고보니 기독교 단체 문구에서 본 것 같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

사후세계로서의 천국만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뤄나간다고 한다.

왼쪽(파란) 천국 Heaven 혹은 God-Space, 오른쪽(핑크) 이 땅 Earth 혹은 Human-space, 가운데 두 세상이 겹치는 부분 - 예수를 통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간다는 걸 이미지로 표현한 것 - 출처: bibleproject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을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란 여덟글자로 다 이해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혼란스러울수도 있겠지만 성경적 이해는 이런 관점을 지지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영적 존재와 인간이 창조주에게 순종하는대신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한다. 신의 피조물이 되기보단 스스로 신이 되길 원하지만 그 선택에 의해 타락한 영적 존재의 편에 속하게 된다. 그리고 C.S 루이스의 비유에 따르면 이 땅이 되찾아야 하는 “빼앗긴 영토”가 된다.

C.S Lewis Doodle -The Invasion- (From Mere Christianity)



이런 관점을 글로만 설명하는 건 무척이나 어려우니 그림이 있는 아래 영상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Heaven and Earth

BIBLE PROJECT - Heaven and Earth *자막은 한국어로 설정 가능

7. 작품의 긍정적 영향


연상호 감독은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으로 신문기사에서 확인되지만 그는 특별히 그의 창작물로 기독교적 세계관을 그리지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한 작가의 권한이다. 이를 보고 반기독교적이고 반종교적이라고 평가하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작가가 묘사한 세계관의 신은 한국 기독교가 드러내는 신에 대하 일반인이 느끼는 바를 묘사한 건지 모르겠다. 폭력적인 신. '폭력적인' 개신교인들에 대한 시선을 그들의 믿는 신으로 변환시킨 건 아닐까?

대중에게 사랑받는 것이 생존을 위한 일차적 목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창작자의 숙명. 그가 창작을 하며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 밖에 없는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신의 대한 왜곡 시선을 제공한다며 기독교 매체들이 부정적 평가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굳이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자면 <지옥>은 사회에 대한 관찰과 상상을 통해 신에 대한 질문, 혹은 종교에 대한 질문의 일부에 대해, 어쩌면 개신교 교회에서 누군가 쉽게 묻고 답변하지 못한 것들을 작품 속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답한다.


Q1. 왜 신은 누가 천국에 가고 누가 지옥에 가는지 드러나게 하지 않았나?

진리를 안다고 느끼는 순간 인간에게 생기는 오만. 자신이 정의의 편이라고 느낄 때 생기는 정당함. 그 위에 인간에 내재된 폭력성.

기독교, 개신교도 이런 인간의 속성(죄성)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자신이 “지옥행”이 아닐 수 있는 이유와 근거를 자신에게 돌릴 수 없도록 예수에 촛점을 두고,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닌 “은혜”라는 것에 방점을 둔다.

누가 지옥에 가는 지 공공연히 알려지는 작품의 세계관 속에서 사람들은 지옥행 피해자(?)의 가족들도 엮어서 비방하고 폭행한다.



Q2. 왜 신은 100% 확신을 주지 않을까?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여느 예술매체에서 묘사하는 것과 같이 소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지 않는다. (소위 이단은 인간의 불안함을 자극하며 여기에 촛점을 두고 공략하기도 하는 것 같다)

확신이 있다면 그건 예수에 대한 확신이어야 하지, 자신이 얼마나 확실하게 믿는지는 절대로 촛점이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내가 의심없이 믿어야 천국행이다? 그럼 그 사람의 믿음의 강도가 그 사람의 구원을 정하게 되기 때문에 이건 기독교적이라기보단 행위중심적이 된다.

이런 부분에 대해 팀 켈러는 이렇게 대조시켜 설명한다.

"(Rephrase) Weak belief on strong object is infinitely better than strong belief on weak object. 

강한 물체에 대한 약한 믿음이 약한 물체에 대한 강한 믿음보다 강하다. "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순간 나무 뿌리가 보였다고 가정해보자.

튼튼한 나무뿌리가 있고 이걸 잡는 행위가 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지 이 사람이 그 나무뿌리가 얼마나 튼튼한지에 대한 확신이 이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다.

Q3. 일시적 죄에 대한 형벌이 영원한 건 불공평하지 않나?

물론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그런 의문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다시 생각해보면 다른 걸 발견할 수 있다. 법적으로 봤을 때 형벌의 시간은 죄에 소요된 시간과 비례해야 하는가?

총기 살인 사건을 상상해보자. 가해자가 총을 발사 하는 건 순간이지만, 피해자의 고통은 순간에 그치지 않고, 만약 사망에 이르렀다면 유족의 피해는 순간보다는 평생에 가까운 쪽으로 계산되는게 합리적이다.

- 정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서의 지옥


또 대학살을 주도한 인물과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 모두 같은 처우를 받아야 한다는 발상이 과연 정의의 개념을 훼손시키지 않을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이런 질문은 아마 신이 심판관이란 개념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나올 것이고, 그 이면에는 정의와 불의를 본인이 경험한 문화권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은 주로 평온한 삶을 살아왔다고 가정하는데 무리가 없을 지도 모른다. 진정한 폭력과 불의를 경험한 사람들은 최종 심판자가 모든 걸 공평하게 심판할 거라는 개념에 오히려 위로를 얻고 살아간다고 한다.

 

발칸반도의 참혹한 내전을 바라본 크로아시아 출신인 미로슬라브 볼프는 이렇게 질문한다.

 

Exclusion and Embrace: A Theological Exploration of Identity, Otherness, and Reconciliation: Volf, Miroslav: 9780687002825: Amaz

Miroslav Volf is the Henry B. Wright Professor of Theology at Yale Divinity School and Director of the Yale Center for Faith & Culture. He has published and edited nine books and over 60 scholarly articles, including his book Exclusion and Embrace, which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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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속에서 가족들이 강간당하고 살해 당한 생존자가 있다면 그런 악인들을 심판하지 않는 신을 공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리가 없지 않은가? 악에게 정의를 구현할 수 없는 사랑의 신은 불완전하다. 



결국 여러 질문엔 이면엔 선과 악의 절대적 기준을 신에게 넘길 수 있는 이들과 스스로가 그 기준이 되려는 이들의 서로 다른 전제의 차이가 있다.

 

 

남을 살리는 힘: 희생에 대한 재조명

 

이렇게나 다른 세계관을 지닌 지옥이지만 인류가 보편적인 감동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을리 없다. 이 세계관의 중심은 알 수 없는 신의 피해자로서의 인간이다. 그리고 그 인간의 가장 숭고한 사랑의 행위는 희생이다. 그런 희생이 가장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관계는 부모-자식 관계이니 가장 죄가 없다고 여겨지는 신생아와 엮어 갈등을 최고조로 설정한 후, 부모의 사랑으로 아기를 살리는 서사구조. 인류공통적으로 감동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내러티브 이다. 작품에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건지, 아니면 죄 있는 자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해 댓가가 필요하다는 개념을 차용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두 부모의 “신의 심판에 대한 반항”은 성공한다.

<지옥>의 결론: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죠”?

 

<지옥>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인본주의적 발상을 택시기사의 입을 통해 내뱉는다. 그리고 돌아보면 애당초 인간들에게 알아서 하도록 맡긴 게 창세기의 시작이었다. 단 한 가지 명령만 있던 에덴동산에서부터 인류는 “알아서” 하는 걸 선택했고 그게 죄의 시작이다. 피조물이 신이 되고자 하는 것. 스스로가 선과 악을 정하겠다고 하는 것. 그런 선택권을 부여한 것 자체가 문제라고 따지기엔 그 선택권이 없다면 모든 게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무의미하다.

기독교적 지옥: 사랑의 신이 존중한 인간의 선택 - 자유의지


성경적 의미에서 지옥의 또 다른 면은 인간의 선택을 마지막 까지 존중한다는데서 발생한다.

사랑하면 끝까지 좋은 곳으로 보내줘야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스토커의 예를 들면 그게 아니란 게 다가온다. A가 B를 사랑한다고 B의 의지와 무관하게 A에게 사랑한다고 쫓아다니는 건 B의 선택을 무시했다는 점에서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천국을 가고 싶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 전제 역시 잘못 되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은 아무리 좋아도 신을 섬기는 이들이 있는 곳(혹은 상태) 자신이 최고가 아니라는 뜻이다. 누군가를 섬기고 누군가에게 종속되기 싫어하는 이들, 자유가 지상 최고의 가치인 이들에게 천국이 맘에 들리가 없다.

 

존 밀튼의 '실락원' 에서는 '천국에서 노예가 되느니, 지옥에서 왕이 되겠다'고 표현한 사탄의 마음처럼, 로 유명한 무신론자, 반신론자 크리스토퍼 히친스도 신이 존재하는 곳에 가고 싶지 않다고 했고, NYU의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 역시 신이 없으면 좋겠다고 했다. 


C.S 루이스는 그의 판타지소설 <천국과 지옥의 위대한 이혼>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궁극적으로 마지막엔 두 가지 사람만 존재한다.
신(하나님)에게 "당신 뜻대로 이뤄지길" 이라고 하는 사람과
신이 "너의 뜻대로 이뤄지길" 이라고 말하는 사람.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선택했다. 자신의 선택없이 지옥은 존재할 수 없다. 
 
There are only two kinds of people in the end: those who say to God, “Thy will be done”, and those to whom God says, in the end, “Thy will be done.” All that are in hell choose it. Without that self-choice there could be no hell. (No soul that seriously and constantly desires joy will ever miss it. Those who seek find to those who knock, it is opened.)

C.S Lewis, <The Great Divorce>  


이런 이들을 위한 신과 단절된 격리장소.

그게 지옥이다.


그리고 그 지옥의 불은 산화 과정을 통해 생기는 불보다 영원히 만족되지 않는 욕구가 끊임없이 더 강해지기만 하는 영적 상태일 것이고 영원이란 시간 속에선 그게 불구덩이에 살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거란 생각이다.

그리고 이미 만족되지 않는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이들에게는 이 세상은 이미 잠재적 지옥이자 지옥의 시작점이다.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에서 지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궁극적으로 지옥의 교리에 거부하는 이들에 대한 답변은 질문의 형태이다. 
"신/하나님께 어떻게 해달라는 건가요?"

어떤 댓가를 치루더라도 그들의 과거의 죄를 다 씻어주고, 새로운 시작을 주는 것?

모든 어려운을 평탄하게 해주고 기적적인 도움을 주는것?

하지만 신/하나님은 갈보리(Calvary)에서 이미 그렇게 했다. 

그들을 용서 해주는 것? 그들은 용서 받는 것을 거부한다.

그럼 그냥 냅두라는 건가?

저런, 어쩌면 신은 그렇게 한 거다. "

In the long run the answer to all those who object to the doctrine of hell is itself a question: “What are you asking God to do?” To wipe out their past sins and, at all costs, to give them a fresh start, smoothing every difficulty and offering every miraculous help? But he has done so, on Calvary. To forgive them? They will not be forgiven. To leave them alone? Alas, I am afraid that is what he does.

C.S Lewis, <The Problem of Pain>


* 천국은 죽어서만 가는 나라인가? 라는 주제의 한국어 설교도 접하게 되어 추가합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에게도 <지옥>과 같이 여러 문화 매체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오해가 쌓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오해를 풀어보고 싶으시다면 다음 글을 추천드립니다.

 

1.1 관점의 예술 (Perceptual Art)

1. 아래 이미지는 마이클 머피라는 예술가의 조형물입니다. 이 예술가는 어떤 이미지는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요? The following image is an art piece of Michael Murphy. What do you think this artist w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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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비과학적인 미신을 갖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과학적 사고가 아닌 '과학주의'라는 사상체계의 편견에 영향을 받으신 걸 수도 있습니다. 

현대과학의 아버지들로 부를 수 있는 뉴턴(Issac Newton), 맥스웰(James Maxwell), 패러데이(Michael Faraday), 보일(Robert Boyle), 달튼(John Dalton)부터 아노 펜지어스(Arno Penzias) 와 같은 노벨상 과학분야 수상자들이 기독교인이라는 걸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그런 분들에겐 옥스포드 수학자 존 레녹스 교수의 강의를 번역한 다음 글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과학과 신앙은 공존할 수 없나요? -존 레녹스 교수 강의(1부)(feat. 칼 세이건, 리처드 도킨스, 리차

오늘은 제가 참 좋아하는 학자/연사의 강의를 소개해보려 합니다. 산타클로스 같은 풍채에 유머와 따뜻한 마음을 겸비한 지성의 소유자, 옥스포드 대학 석좌 교수인 존 레녹스 박사입니다. 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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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T 핵융합 교수 이안 허친슨의 강의를 번역한 글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기독교가 과학의 발전을 막았다구요?! (1부) -MIT 이안 허친슨 교수가 말하는 과학주의(Scientism)-

지난 글에서 소개한 MIT 대학의 과학자 이안 허친슨(Ian H. Hutchinson) 교수의 강의를 듣게 되어 그 강의를 글로 남겨봤습니다. 이안 허친슨 MIT 교수  지난 번 소개 했던 라이스 대학의 합성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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